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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아부지가 가족단톡방에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엄마가 알려준 돼지고기 신메뉴를 만들어 먹으라는 이야기였다. 혼자 살며 여러 요리를 연습하던 그는, 근래 한국에 들어와 엄마에게 많은 요리를 전수(?) 받았고 그 중에 하나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엄마의 돼지고기 레시피를 해먹으라며 아빠의 팁도 설짝 넣어 전달해준 짧고 간단한 레시피였다.
준비물 : 야쿠르트, 배추잎과 기타 야채들, 그리고 제일 비싼 통삼겹 돼지고기
알겠다고 하고 몇 주 정도 묵혀두었다. 정말 무언가가 강렬하게 먹고 싶은 데 그 메뉴를 찾지 못한 어느날 해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어제 찾아왔다. 비가 내리던 밤, 회사에서 느즈막히 일을 끝내고 나와 눈에 보이는 대형마트에 빨려들듯 들어갔다.
입구에 놓인 전단지엔 돼지고기가 할인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육코너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목살과 앞다리살, 삼겹살 등등 부위들이 다양한 무게로, 여러 가격대에 맞게 조합되어있었다. 그 다양성 때문에 100g 당 가격이 조금씩 달랐다. 최소 1,800원부터 2,150원. 앞다리와 삼겹살이 섞인 것이 가장 무게도 많이 나가고 비쌌다. 가장 비싼 통삼겹을 사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통삼겹이 보이지 않으니 그와 가장 비슷한, 삼겹살 단독 구성으로 선택했다. 그 다음엔 야채코너로 향했다. 배추잎 4장을 맞출 수 있는 어떤 야채가 필요했다. 이정도 고기라면 3~4끼니를 때울 수 있을 텐데, 배추잎 20장 정도는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리번거리니 맛있어보이는 아스파라거스도 발견했다. 구워먹기에 딱 좋아보였다. 왼손으로 하나 짚고, 오른손으로는 20장 정도 들어보이는 쌈채소 세트를 골랐다. 계산하러 가는 길에 눈에 어른거리던, '김치맛 김부각'까지 하나를 더 고르고선 쇼핑을 끝냈다. 한 손 가득 봉지에 재료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바로 해먹진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요리를 시작했다. 우선 냉장고에서 삼겹살을 꺼냈다. 그 중 두 줄을 꺼내 후라이팬에 올려두었다. 다시금 아부지의 레시피가 떠올랐다. 그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다른, 재료가 그나마 조금 비슷할 뿐 그 외에는 그가 이야기 한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마 그는 통삼겹으로 만드는 보쌈같은 (혹은 오향장육같은) 요리를 생각하며 저 레시피를 보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요리를 하기 적절한 도구가 없었다. 재료도 팔지 않았고, (핑계지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배추잎 4장보다 아스파라거스 맛이 더 궁금한 나였다.
삼겹살 두줄을 '굽고', 집에있던 냉동 야채를 또 구워댔다. 레퍼런스 삼은 레시피와 같은게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재료 빼곤 같은게 (솔직히 말해) 하나도 없었다. 요리 방식도 다르니, 이걸 정말 '아버지 레시피를 따랐다고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만든건 이것이었다. 삼겹살& 야채구이. 그 위로 파마산 치즈가루와 양고기용 쯔란을 반반 뿌려 먹었다. 모든 걸 후라이팬으로 처리했다. 요리는 (아부지 말대로) 정말 간편했다.
요약하자면, 시작은 통삼겹 + 배춧잎이었지만 결국 삼겹야채구이가 되었다. 아버지가 알려준 레시피를 보았지만 레시피 대로 하지 않았다. 준비물은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요리를 했다. 이게 나와 아버지의 삶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내게 전해준 (인생 사는 법) 레시피, 그리고 그의 DNA를 갖고 태어났지만 나는 결국 그의 조언과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레시피를 참고만 했을뿐 나는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로 재구성했다. 그 말을 100% 따르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쉽지만, 사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재구성하는 사람
어린시절부터 종종 비슷하게 흘러왔던 몇몇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공통적으로 그런 기억이 있다. 재구성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서, 열심히 내 나름대로 다시 쌓아올려야 했고, 그런 역할을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누군가에게 내 운명에 대해 물어보았을때에도, 운명론자는 내게 '너는 무언가를 만들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그런 나의 성격이 장점이 되는 순간도, 단점이 되는 순간을 너무나 많이 직면했었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트러블이 있었다. 베이스가 없어 처음부터 구축을 해야 했던 곳에서는 나의 이런 성격을 반겼다. 과거 형식을 틀어 비스듬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세상에서 호응을 받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본성을 숨기려고 했던 적도 몇 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본질적인 나'의 모습을, 아버지의 레시피를 레퍼런스 삼아 요리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발견했다. 내가 부정하려 해도 매번 직면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성격인, '재구성' 을 이제는 조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부지의 레시피가 준 것, 그 '아부지 스러움' 을 나는 어떻게 해석하고 살아왔나 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덧붙여, 음식이 맛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혼자 해 먹는 요리였지만 혼자인 느낌을 받지 못했다. 누군가가 내게 '요리해보라면서 주는' 레시피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단 걸 이번에 알았다. 지금까지 접한 레시피는 내가 '검색해서' 알게 되는 것 뿐이었다. 정성스러운 편지처럼, 강조표시 ***까지 들어있는 레시피 선물은 처음이었다. 그 레시피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요리를 먹은 듯한 느낌을 받은 그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