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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Jan 16. 2024

예의와 음료수


새해맞이 서랍 정리를 했다. 수집광 기질이 있는 나지만 큰맘 먹고 안 쓰는 물건들을 당근마켓에 내놓기로 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갖고 있던 스티커를 모아 학생 대상으로 무료 나눔을 했다. 경제적 여건이 되는 성인보다는 학생이 받았으면 했다.


귀여운 학생들을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예의 없는 메세지들이 쏟아졌다. 새벽에 메세지를 보내거나, 택배로 보내달라거나, 거래를 잡아놓고 오는 길을 몰라서 못 오겠다 등등.


몇 번의 거래가 끝나고 마지막 거래만 남아있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빨리 해치우고 싶단 마음이 더 커졌다. 마지막으로 거래하기로 한 학생은 당일에 배터리가 없다며 약속 시간에 연락이 안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알겠다 한 뒤, 심드렁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는 데 정말 앳돼 보이는 학생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학원에서 바로 왔다던 그 학생은 활기찬 메세지와 다르게 낯가리는 모습이었다. 스티커를 건네고 인사하려는데, 자기 몸집만 한 백팩을 뒤적거리더니 처음 보는 브랜드의 음료수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처음에는 괜찮다고 사양하다가 준비해온 마음이 무색해질까 봐 고맙다며 받았다.


조심히 가라며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고 돌아오는데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순수한 무례함도 용납 못 하는 사회에 찌든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어른스러워진다는 건 이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작은 반성과 함께 비로소 새해맞이 정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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