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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훈 Jul 11. 2016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즘, #메갈리아, #일베, #소라넷



여전히. "너 메갈하니?"라는 물음은 "너 빨갱이니?"하는 질문과 크게 무리없이 치환될 수 있다. 남조선에 침투한 종북 빨갱이들의 새빨간 거짓말들을 색출하고자 하는 노력과, 남성 중심 사회의 담론 구조를 견고히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 간 상이점은 크게 찾아볼 수 없다. 이미 장처럼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담론-권력 안에서 새로운 방식의 말은 외부에서 침투한 병원균과도 같다. 기존의 남성 중심 담론(또는 자본주의적 담론)에 익숙한 자들은 위화감을 주는 말을 내뱉는 자들을 외부인으로 규정한다. 빨갱이와 메갈리안으로 재단된 외부인은 기존의 담론-권력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제서야 권력망은 균질한 장을 회복할 수 있다. 그 권력망의 외부는 어디이며 권력의 작용을 통해 희생되는 자가 누구인가의 문제가 두 질문의 유일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메갈리아의 담론 형성의 방식으로서 '미러링'은 주목할 만하다. 미러링은 거울처럼 비추어 말하는 방식이다. 거울이 같은 상을 좌우만 반전시켜 보여주는 것처럼, 미러링을 통해서 성에 대한 담론은 젠더 위계만 반전되어 똑같이 재현된다. 젠더 위계의 반전은 말의 주체, 그리고 문장의 주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재현된 담론 속에서 남성은 대상화되어, '6.9cm의 작은 성기를 지닌 한남충'으로 재현된다. 'A컵의 작은 가슴을 가진 김치녀'가 담론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만으로 새로운 말들은 위화감을 주며, 난폭하고, 혐오스럽다. 기존의 성에 대한 담론들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메갈리아는 금지되어야 하고, 색출해서 배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위시한 페미니즘의 성적 담론은 여전히 미미하다. 또한 오늘날 성에 대한 담론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분석한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부와 고해자라는 구도 속에서 고백의 방식으로 성을 말하던 18-19c는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이다. 우리는 성을 소비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또는 판매자와 구매자, 공급자와 수요자)의 구도 속에서 소비의 방식으로 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성에 대한 담론은 욕망-소비적이다.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성에 대한 담론들이 생산되며, 확산되고, 소비된다.

소비의 방식은 권력의 주체성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매우 은밀하며 공고하다. 반면 고백의 방식은 담론을 제한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푸코에 따르면, 19c에 성은 고해자와 신부, 학생과 교육자, 환자와 정신과 의사의 관계 속에서 고백되어 왔다. 고백은 성을 말하고 행하는 방식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전제한다. 이때 고백의 화자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평가받아야 하는 객체로, 고백의 청자는 고백을 해석하고 평가해야 하는 주체로서 각각 상정된다. 이러한 관계는 성을 말하고 행하는 일정 방식을 제한하고 규제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권력-주체는 관계 속에서 고백의 청자로서 재현된다.

소비의 방식에서는 담론에 대한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다. 모든 방식으로 성은 말해질 수도 행해질 수도 있다. 다만 어떤 담론이 더 잘 팔리며, 더 많이 소비되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더 많이 팔릴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게 되는데, 이때 성에 대한 담론의 구매자는 결코 부정적-권력-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담론을 평가할 수 있는 권위를 갖지 않으며, 다만 자신의 욕망에 맞는 성에 대한 담론을 구매하고 소비할 뿐이다. 때문에 생산자는 자연스럽게 스스로 구매자의 욕망에 맞춰 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강제의 부정성이 아닌 더 많이 팔리고자 하는 자발적인 노력의 긍정성이 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균질한 성에 대한 욕망-소비적 담론이 사회 내 만연해진다. 오늘날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보이지 않으나, 남성 중심의 성적 담론은 더욱 공고해졌다.

일베와 소라넷은 성에 대한 욕망-소비적 담론이 거래되는 일종의 시장과도 같다. 커뮤니티는 더 많은 공감을 얻은 게시물이 더 많은 노출의 기회를 얻는 구조를 갖는다. 게시물을 생산하는 자들은 말하기 이전부터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아니 더 많이 팔리기 위한 말하기 방식에 대해 고려한다. 팔리기 위해서라면 저렴하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성을 말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오직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서만 상정된다. 여자를 강간하기 위한 최음제가 거래되고, 여자의 성기에 흉기를 삽입한 사진이 게제된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팔리기 위한 담론 속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도구화 될 수 없는 여자들은 김치녀라는 카테고리 아래 분류된다. 재밌는 부분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대하는 태도이다. 남성 지배적 권력-담론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은 욕망이 없어야 한다(선택의 권력). 욕망이 있는 여성들은 흔히 '외국인 좋아하는 김치녀'로 지칭되는데, 이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외제에 대한 동경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전략으로 보인다.

심각한 점은 일베와 소라넷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일베와 소라넷의 극단적인 욕망-소비적 담론들은 하위 커뮤니티와 하위 문화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남성 유저 중심의 하위 커뮤니티에서는 일베의 언어로 일베의 게시물이 공유되고, 성매매 업소 정보를 공유하고 유출 야동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사이트는 수도 없이 생성되고 있다. 이러한 욕망-소비적 담론의 확산은 자발적인 유흥거리로 여겨진다. 남성의 욕망(권력에 더 가까운)이 유흥처럼 말하여지는 과정에서 여성의 도구화는 일종의 취향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소비자의 취향을 위해, 여성은 콘텐츠 속에서 '산부인과처럼 다 벌'리는(송민호) 욕망-대상으로서, 또는 감상을 위한 헐벗은 시체(서든어택)로서 재현된다. 팔리기 위해 욕망-소비적 담론을 생산하는 일도, 취향에 맞아 그러한 담론을 소비하는 일도 모두 시장의 자유로 인식된다. 그 속에서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는 은폐된다. 이러한 면에서 '여성혐오'는 실상 여성 주체에 대한 혐오로 이해되어야 한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또는 권력의 피지배자로서 여성은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문제는 성에 대한 담론과 실천의 영역이 서로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은 그들의 성이 말하여지는 방식대로 행동한다(코르셋). 그렇지 않은 여자들은 쉽게 재단되고, 평가되고, 배제된다. 여성은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제모와 브레지어). 여성의 욕망은 쉽게 부정되고, 섹스를 거부할 권리 마저 인정받지 못한다(싫다는 게 싫은 게 아니야). 반면, 기존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들은 욕망을 소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남자들의 단톡방에서는 외모 품평부터 강간 모의까지 대화가 이뤄진다(고대 단톡방 문제). 자신의 욕망을 거부한 여성에게 일상적인 폭력을 가한다(데이트 폭력, 이별 이후 스토킹 또는 살인). 무엇보다 사회는 이처럼 권력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자유, 취향,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데에 전념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조헌병자의 살인으로 규정되는 순간, 도구화된 여성을 욕망 충족을 위해 소비하는 남성 중심의 담론-권력의 망은 보이지 않는다. 성에 대한 담론들이 변치 않는 이상, 여성은 끊임없이 소비되고 배제되며 살인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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