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많은 카톡방 사건들의 가해자 옹호 논리에는 어김없이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도대체 이 개념을 어떤 의미로 써야만, 강간 꿈나무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을까. 그들이 자유를 소환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사적 영역(카톡방)에 대한 공적 간섭(외부의 비난과 비판)으로부터의 자유. 그들은 강간을 욕망하고, 여자들을 품평하며, 유출 야동을 공유할 수 있는 사적 영역을 마음껏 보장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에 대해 도덕적, 법적으로 비난 또는 제재를 하는 데 있어서 분개한다.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마라!"
2.
자유에 대한 고전적인 두 해석의 차이를 먼저 이야기해보자. 벌린에 따르면, 자유는 크게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뉘어볼 수 있다. 먼저, 소극적 자유는 외부적 간섭의 부재를 의미한다. "나는 외부의 강제 또는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 둘째, 적극적 자유는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기에 자유롭다." 간단하게 봤을 때, 두 가지 정식은 강간 꿈나무들의 '자유' 사용 용례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맘껏 지껄일테니, 너희는 아무 간섭 좀 하지 말아줄래?"
3.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니 입맛대로 간단하지는 않다. 두 자유 모두 일종의 윤리적 판단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 개입으로부터 사적 영역을 보호하고자 하는 소극적 자유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함께 주창되기 시작한다. 공권력의 개입은 경쟁시장의 효율적 운영을 저해한다. 따라서 생산과 거래라는 사적 영역에서 국가의 개입은 최대한 배제되어야 한다. 흔히 듣는 '야경국가론'은 이러한 소극적 자유의 개념 아래 국가의 역할에 대해 명시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소극적 자유에는 사적 영역(시장)에 대한 공적 간섭(국가의 개입)이 공공의 행복을 저해시킬 것이라는 윤리적 판단(좋음과 나쁨에 대한)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적극적 자유는 그 자체로 윤리성과 직결된다.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자유'는 동물과 같은 정념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으로서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판단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서야 우리는 자유롭다(autonomy). 즉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도덕적 원칙들을 만들고, 이에 따라 행동할 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행동의 윤리성(옳고 그름nomos)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autos) 세우며 이에 따라 행동할 것, 이것이 본래 적극적 자유의 의미이다.
4.
그럼 강간 꿈나무의 '자유'를 이러한 틀에서 소환시켜 보자. 1) 사적인 톡방에 대한 공적 비난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껏 자유롭게 강간을 모의하고, 여자를 품평하고, 유출 야동을 공유할 수 있어야 공공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나는 내가 정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며, 이에 자유로운 존재이다. 스스로 정한 원칙이란 여성의 몰카를 찍고, 이를 공유하며 품평하고, 강간하고 싶다고 거침없이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원용되는 자유는 또 다음과 같은 상황들 속에서 발견하기 쉽다. 아내고 자식이고 가릴 것없이 폭력을 휘드르는 가장들; "가정은 나의 사적 영역이니, 니네가 내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건 물건을 던지건 뭐라고 간섭할 권리는 없어. 이건 내 자유야." 그리고 일베들; "노무현이든 세월호든 상관없이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맘껏 짓껄일 수 있는 자유가 있어."
5.
혁명은 계급구조와 왕정, 그리고 불평등과 각종의 차별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희생으로 혁명의 끝에서 얻어낸 '자유'는 분명 값진 가치였다. 이렇게 얻어낸 자유는 기존의 왕과 귀족의 계급적 이익을 수호하던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사적 영역을 보존할 수 있는 권리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모두 의미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자유가 고작 강간 꿈나무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쓰이고 있다. 혁명에서 흘린 피로 그 꿈나무들은 강간에 대한 욕망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영역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도대체가 자유가 한국까지 와서 고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