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소회 #1.
0. 부채 일반
부채는 어디에나 있다. 대학 등록금, 노트북 할부, 신용카드 결제, 또는 내 차와 집 장만 무엇하나 빚을 지지 않고서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부채는 그 옛날에도 있었다. 보릿고개 때 관아에서 나눠주는 구휼미도 결국 갚아야 하는 빚이었고, 저 멀리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리대금업의 잔혹함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이런 부채의 핵심은 시간성이다. 오늘의 소비를 위해 빚을 지고, 내일의 생산을 통해 빚을 갚는다. 빚을 진다는 일은 개인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일과도 같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부채(Schulden)와 죄(Schuld)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한다. 마치 원죄를 탕감하기 위해, 이생에서 끊임없이 속죄해야 하는 것처럼. 금융사회의 사람들은 어제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오늘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대출을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부채가 기능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는 "대출자가 내일은 생산을 하는가(생산활동에 참가하는가)?"일지 모른다. 생산하지 않는 대출자라면, 갚을 돈도 빼앗아 올 물건도 지닐 수 없다. 오늘날 이러한 전제는 신용담보라는 형태로 대출을 제약하고 있다. 내일 생산하기 어려운 사람들, 생산을 많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낮은 신용이라는 굴레를 씌운다. 다시 말하자면, 신용이 낮다는 의미는 내일의 생산에 대한 기대가 낮다는 뜻이며, 이에 신용이 낮은 사람에게 빌려 준 돈은 내일 또는 모레일지라도 회수되기 어렵다. 이러한 대부자의 원금 회수에 대한 위험은 신용에 따른 대출의 차별화를 통해 완화된다.
비록 노동의 형태와 종류는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반적인 인간들은 살아서 노동하고 또 노동해왔다. 대출이 보편적인 사회제도로서 기능하는 데에는 인간이 지닌 노동이란 속성이 필수적이었다; 내일도 노동해야 하는 인간의 속성상, 오늘은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내일은 무언가를 생산해내리라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빼앗아 올 수 있는 무언가가 미래에는 생길 것이기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도 돈을 빌려줄 수 있다. 때문에 '노동하는 존재'로서 인간 사회에서는 대출이 보편적인 제도로서 기능하게 된다. - 따라서 우리는 노동의 형태와 종류의 변화에 따라, 일반적인 대출의 양상이 변화되리라 기대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년에 일회성으로 생산물이 주어지는 농경사회에서는 생산물이 떨어지고 삶을 지속할 수 없게되는 (계절적)시점에 대출이 성행할 것이다. 반면, 주기적으로 생산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는 현대 노동시장에서는 신용카드를 통한 소비가 가장 만연하게 관찰될 수 있는 대출 형태일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더 이상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게 될 때 발생한다. 혹 미래에 인간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게 되면 또는 노동할 수 없게 되면, 부채의 형식은 어떻게 변화할까?
1. 노동하지 않는 인간
굳이 4차 산업혁명까지 논의를 확장시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노동하지 않는 인간들을, 노동할 수 없는 인간들을,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청년의 실업률은 매해 최고치를 갱신하고, 노동에서 배제된 노년층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산업화에 따라 기본적 노동에 요구되는 지식적 능력이 높아질수록, 장애인과 같은 (경제적, 혹은 신체적)소수자- 소수자의 범위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점차 확대될 수 있다-들은 점점 노동에 참여할 수조차 없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대출이 가장 필요한 이들 역시 더 이상 노동을 자신의 속성으로서 향유할 수 없는 이들, 즉 실업자와 노년층과 소수자들이라는 데 있다. 노동하는 존재가 아닌 이들은 어떤 형식 아래 부채를 빌릴 수 있으며, 삶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소비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걸까.
사회보장제도는 이들의 삶을 위해 핵심적이지만. 여전히 청년들은 먼 미래를 담보하여, 노년은 저축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담보할 미래도 갉아먹을 과거도 없는 이들의 삶을 감추고 배제하여, 정상적인 사회에서 분리해왔다. 감출 수 있고 배제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이들의 범위가 양적으로 넓지 않았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노동으로부터의 배제가 사회-구조적 원인에서 촉발될지라도, 사회의 전면적인 현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개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다. 돈을 빌려야 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노동시장이 더 이상 자신을 상품으로서 받아주기 않기 때문일지라도, 사회는 "네가 노력하지 않은 탓이야"라고 비난하며 부채를 온전히 개인의 죄로 귀속시킨다. 노력의 담론 속에서 이미 배제된 이들은 같은 양의 돈을 빌릴지라도, 더 많은 내일을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을 저당잡혀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배제되는 현상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문제는 심화될 수 있다. 인구구조의 변화로 노년층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노동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술의 수준이 점차 높아진다면, 더 많은 인간들은 노동을 자신의 속성으로서 향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자들이 사회에 만연해질 때 이들은 어떻게 부채를 질 수 있을까?
2. 강요된 소비- 부채의 생산
자본주의는 소비가 있기 위해선 생산해야 되며, 생산된 것들은 소비되어야 한다는 매우 단순하고 흥미로운 문제를 갖는다. 산업사회 초기에는 소비하기 위해 생산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일반 대중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재 수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멜서스의 인구론은 생산이 더 빨리 늘어나지 않는다면, 인구 전체가 기아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멜서스의 예측이 실현된 바 없는 것처럼, 오늘날 더욱 중요한 문제는 생산된 것들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만들어진 제품들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면, 기업은 적자를 면치 못하고 파산할 수 있다. 가계에게 임금을 주는 곳이 없어지게 되면, 더욱 소비는 둔화될 것이고 경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된 제품들이 모두 소비되어야 경제는 굴러갈 수 있기에, '돈을 가진 소비자들'은 자본주의가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돈을 가진 소비자들이 사회 핵심을 이루고 있던 중산층의 시대는 지나가 버리고, 점점 소득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경제는 자꾸 발전하는데 소득은 늘지 않는 기괴한 현상은, 사야할 물건은 점점 많아지는데 잔고는 텅텅 비어버린 내 통장을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빈 통장의 문제가 개인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득 불평등으로 인해 중산층의 두께가 얇아질수록, 능력을 벗어난 소비로의 강요가 사회 전반에 작용하게 된다. 경제가 과다생산-과소소비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회 전반에서 소비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를 강요하는 장치들은 너무나도 깊숙이 우리 삶의 전반에 침투되어 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광고들, 미디어를 통해 표준화되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 상품과 상품 간 촘촘한 연결을 통해 소비자를 포획하는 그물망, 노동시장에 상품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갖춰야만 하는 필수재들. 이러한 소비의 강요는 자신의 소비능력을 자꾸 잊게만 만드는 신용카드와, 저이자 그리고 대출 규제 완화와 같은 정책을 통해 완성된다. 현대인은 자신의 능력을 너머 소비하기를 강요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요된 소비의 책임은 가계부채라는 형태로 개인에게 귀속되고 있다.
3. 자본과 권력의 얽힘; 태극기집회
그래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인간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게 되면 또는 노동할 수 없게 되면, 부채의 형식은 어떻게 변화할까?" 강요된 소비와 가계부채의 증가는 분명 핵심적 문제이지만, 우리는 좀 더 상상해야 한다. 생산된 물건이 팔리기 위해 사회는 소비를 강요하고, 강요되는 소비량을 맞추기 위해 개인은 빚을 진다. 개인이 빚을 질 수 있는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하고 노동할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사회에 만연해진다면, 개인은 소비를 위해 빚을 질 수 없고, 대출받지 못한 이들은 강요된 소비를 맞출 수 없으며, 경제는 다시 과다생산-과소소비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까?
물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한낱 상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 현실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할지라도 포착과 해결의 동시적 과정 속에서 진행되기에 상상과 같은 결말에 봉착하리라 기대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를 지속하는 까닭은 부채로부터 시작된 인간 노동의 변화 현상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태극기 집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까닭이다. 비록 태극기 집회가 모두 동질적인 구성원으로 이뤄지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집회에 참가한 이들 중 일당을 지급받는 형식을 통해 동원된 이들이 다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좀더 범주화 시키자면, 이제는 정치적 의사의 표명을 통해서도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부채가 노동이란 매개를 통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가치를 창출하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수단이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이 점점 외재화되어 인간은 더 이상 생산하지 않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가치를 지니며, 어떤 가치를 담보받아 부채를 질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하지 않는 존재가 소비마저 할 수 없게 된다면, 이들은 필연코 사회에서 배제되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다른 가치, 혹은 다른 영역에서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한 정치참여의 권리는 인간으로서 지니는 또 다른(또는 현대사회에서 주어진 새로운) 보편적 가치이다. 부채는 점점 정치참여라는 가치를 담보잡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는 소비하기 위해, 대부자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해줘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태극기 집회는 이러한 면에서 굉장히 시사적이다. 노동에서 배제된 노년층들이 일당을 벌기 위해 동원되어, 정치적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명한다. 그들은 일종의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중인데, 이들이 생산하는 것은 고용주의 정치적 입장을 다수의 목소리라는 형식 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여지껏 민주주의는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자 간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조절하는 형식으로서 기능해왔다(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미뤄두고). 하지만 이제 노동에서 배제된 자들이란 새로운 행위자의 부각과, 이들이 자신이 지닌 정치적 의사표명의 권리와 일자리를 교환하게 되면서, 자본가란 계급은 새로운 정치적 동맹 또는 노예(servitude)를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부채는 미래의 노동을 저당잡던 기존의 형식으로부터, 미래의 정치적 의사표명을 저당잡는 새로운 형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