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4월 11일 격리 5일 차

19개월 4일

by 마이문

흰 바닥에 아무 글자나 써 내려가도 되는, 일기를 쓴다는 행위가 갑자기 굉장한 복이라 여겨진다. 복기할 하루가 있다는 것도 엄청난 행운인 것 같다.


세 식구가 아주 꽉 찬 하루를 보냈다. 미디어를 아예 접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고, 서방구와 하루의 끝에 입을 모아 말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생각보다 더 좋았다고. 우주가 혼자 방황하는 시간이 없었고, 핸드폰에 푹 잠겨있는 서방구를 다그치듯 부를 일도 없었다. 마음이 평온했다. 시간이 나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우주가 잠들어 자유시간이 생기면 일단 핸드폰부터 열어보느라 그렇게 30분, 많게는 한 시간을 쓰기도 했으니 정작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뒷전이 되고 결국 못하게 되기도 했다. 서방구와 나는 소문난 검색충인데, 검색하고 싶은 순간이 이렇게나 많구나 놀라기도 했다. 검색 욕구(?)를 누르는 순간마다 서방구와 폭소했다. 당장 알아보고 싶은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답답했지만 또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사진을 덜 찍게 되었다. 주어진 시간을 우주에게 충실히 쓰고 있으니 우주의 찰나를 대할 때 아쉬운 마음이 없어서 그랬을까. 이제 노래의 음을 따라 하는 우주의 간드러진 목소리를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았다. 서방구가 내는 추임새도 똑같이 따라 했는데,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을 때마다 우주에게 요청해서 하루 종일 여러 번 들었다. 덕분에 우리 셋이 많이 웃은 하루였다. 그래서 내일도 미디어 없이 보내기로 했다. 누워서 자기 전에만 핸드폰을 열어 보기로.


마침 고난주간에 마침 자가격리인 것도 신기한데 마침 또 월요 묵상 본문이 유월절 첫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 날 밤 하나님의 영이 이집트 전역을 다니며 마지막 재앙으로 처음 난 것의 생명을 앗아가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남도록 재물로 드렸던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라 표시하고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때 문에 바른 피는 훗날 인류를 구원한 예수님의 피를 의미한다. 우리는 격리 덕에 유월절을 맛보기로 체험하게 되었다. 먹을 것을 준비해 두고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이 순간이 괜히 이집트 탈출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의 그날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고 나니 남은 격리 기간을 더 값지게 보내고 싶어 진다. 격리가 끝난 후의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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