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0일
오랜만에 새벽 2시 30분에 깼다. 일어나서 양치하다 문득 우주를 재우다 기절하고 몇 시간 뒤에 눈이 떠지는 이 기분이 오랜만인 것 같아서 지나간 일기를 찾아 읽었다. 오랜만이라고 해봐야 2달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3월 말까지도 우주와 기절하고 아침에도 동시에 깨는 일이 스트레스라고 적혀있었다. 코로나로 격리했던 4월 초까지의 일기를 찬찬히 읽었다. 1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득한가 했더니 그 사이에 보인 우주의 성장세가 놀랍도록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도 손바닥 뒤집은 듯 지금과는 달랐다. 자주 지친다고 적었고, 힘을 내야만 한다고 다그쳤다. 코로나를 지나오며 긴장이 풀려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훨씬 더 전부터 속이 곯아가고 있었다.
동생의 동탄 방문으로, 서방구에게 깊은 마음을 토로함으로, 친정에서 지냄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회복된 몸과 마음은 어제 서울 사는 친구와 시간을 보내며 완전 충전되었다. 우주가 졸려서 나를 보내기 싫다고 우는 바람에 위기가 있었지만 서방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친구 집에 갈 수 있었다. 이케아에서 바리바리 사들고 간 집들이 선물이 친구와 친구 동생 마음에 쏙 들어서 덩달아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점심으로 주문해준 떡볶이가 진심으로 맛있었다. 시장에서 어묵 국물과 함께 먹던 떡볶이 양념 맛이랑 비슷했다. 크림소스는 또 왜 그리 맛있는지! 키토 김밥을 소스에 적셔 먹는 게 너무 맛있어서 배가 부른데도 꾸역꾸역 더 집어넣었다.
친구의 새로운 동네로 나와 구움 과자가 맛있다는 카페로 향했다. 전에 살던 곳은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핫한 거리라서 젊음의 열기가 밤이고 낮이고 가득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곳은 정겨웠다. 거기에 살랑살랑 봄바람도 불고 하늘이 푸르고 예쁘니 동네 분위기가 더 따뜻해졌다. 아주 작은 카페에 다행히 자리를 잡았다. 라테와 마들렌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친구는 고등학교 때 두 번째로 만난 짝꿍으로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좋아하는 아이돌이 같아서, 여동생을 둔 첫째라서, 교회를 다니는 것도 같아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도 아이팟을 썼던 얼리어답터 중에 얼리어답터. 친구를 통해 내가 모르던 세상을 많이도 배웠다. 지금 취향으로 가진 것들 중에 많은 부분이 친구에게 받은 영향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주 연락을 이어가는 편이 아니라서 멀리 살게 된 후로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워 항상 만나러 가겠노라 마음으로 다짐하곤 했는데. 드디어 만났다.
지나간 이야기, 사는 이야기, 마음을 말하는 이야기를 이어가며 카페에서 중랑천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의 예상으로는 천이 넘칠까 봐 만든 둑 위로 산책로를 조성한 것 같았다. 양쪽으로 늘어선 커다란 나무들이 울창한 숲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햇빛이 들어올 틈 없이 나무로 빼곡했다. 가던 길에 중랑천 방향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둔 스폿이 있었는데 마침 두 자리가 남아있어 얼른 앉았다. 건너 마을 뒤로 보이는 아차산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참을 울타리에 발 올리고 앉아 더 이야기했다. 여기 너무 좋다는 말을 반복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래야겠다. 친구도 나도 조금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 한 뼘 더 성장하고 모든 게 다행인 지금을 살고 있어서 감사했다. 또 새로운 서울을 만났다는 사실이 내내 벅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6시로 끊어두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일어나 지하철 역까지 다시 걸었다.
서방구는 오늘 종일 여유롭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여유로운가에 대해 우리는 종종 한 마디씩 의견을 보탰다. 둘 다 확실하게 동의한 것은 우리가 성장해서 그렇다는 것. 서방구는 그것을 우리가 부모의 삶에 적응했다고 표현했고 나는 이제 집안일과 육아가 우리에게 더 이상 귀찮거나 미뤄두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는 뇌가 쉬고 있다. 그리고 엊그제 오랜만에 요가를 하다가 깨달았는데, 등이 아프지 않았다. 우주의 100일이 지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계속 등에 생기는 통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제 긴장하지 않는가 보다.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마음속으로는 계속해서 내 상태에 대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던 지지난주의 내 몸과 마음이 온데간데없으니. 우주를 보는 기쁨으로 충만하고 또 충만해서 자꾸 웃음이 나니. 언제나 그랬듯 시련을 지나서 더 강해지는구나. 강해진다는 것은 역시나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견디는 것에서 오는구나. 어쨌든 나는 또다시 일어났구나. 또 언제 지칠지 모른다. 지치지 않기 위해 잘 관리하며 살면 가장 좋겠지만 삶이라는 게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사람이라는 게 자신의 상태를 바로바로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나약하다. 그래도 다음에는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리고 쉴 틈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지난 일기를 읽으며 들었다. 내 템포를 더 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어버이날이 오기 전에 정신이 맑아져 다행이다. 지난주에 얼굴 봤으니 안 와도 된다고 하시긴 했지만 어버이날 당일에 만나지 못하는 게 맘에 걸려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카네이션을 양가에 보내드렸다. 생각보다 더 행복해하셨다. 꽃을 화병에 꽂은 사진 두 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더워지기 전에 머리가 맑아져 다행이다. 외출이 지치는 날이 오기 전에 우주와 이 계절을 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