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20일
일기를 며칠이나 밀렸다. 잠에 늦게 드는 우주를 기다리다 기절하거나 용케 버텨서 야식과 맥주를 먹고 기절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너무 자고 싶은데 쓰고 싶은 만큼 다 쓰진 못해도 몇 줄 남기고 자야 나중에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졸음을 참고 며칠 간의 일상을 남겨본다. 서방구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방해가 되지만 침대에서 나오고 싶진 않다. 계속 발로 툭툭 치며 컨트롤해보고 있다.
우주의 언어영역은 하루가 다르게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삐, 집"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 이모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내 동생이 며칠 내내 종이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그려주고 커다란 화살표를 만들어주는 등 우주의 취향을 그야말로 제대로 저격한 놀이를 선보였기 때문일 거다. 덕분에 어제부터 우리 집 거실은 종이와 펜으로 난장이 되어있다. 오늘은 좀 업그레이드해서 종이 두 장을 겹치고 그 사이에 반으로 자른 종이를 넣어서 엘리베이터 문을 만들어 주었다. 꼬리 없이 세모난 화살표 모양을 오려주니 그것도 참 좋아했다. 다른 모양들도 그려서 오려줬는데 행복한 표정으로 팔랑팔랑 들고 다녔다. 그게 그렇게 좋을까? 박스를 주워다가 엘리베이터를 재현해줘야겠다.
어제는 페이크미 쇼룸에 한번 더 다녀왔었다. 엄마가 내 선글라스를 너무 맘에 들어해서 세일이 끝나기 전에 가야 할 것 같아 대전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정을 잡았다. 지난번 구매할 때 잘못 딸려온 클립온도 다시 반납해야 하고 다른 색상 클립온도 하나 더 구매하고 싶었다. 문제는 체력이었는데, 다행히 버스가 서울에 진입하자마자 아드레날린이 뿜 뿜 솟아나 우주를 내내 안고 다니면서도 즐거웠다. 엄마 선글라스와 내 클립온을 구매하고 잘못 받은 상품도 무사히 다시 돌려드렸다. 나의 재미만 취하고 가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라 우주를 위해 도산공원에 들렀다. 모래 바닥이 등장하자 흥분한 우주는 공원 내 체육시설에 머무르며 간식을 먹는 동안 그곳을 신나게 누볐다. 여기까지 쓰다가 또 잠이 들었다. 하루가 더 지나니 기억이 흐릿해진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사촌동생이 일하고 있는 시몬스 팝업에도 또다시 들렀다. 지난번 우주가 품에서 잠드는 바람에 굿즈샵만 쓱 훑고 나온 것이 아쉽기도 했고, 딱 저녁 시간대가 되어 2층의 버거샵에 가서 버거를 먹어볼 생각이었다. 일하고 있는 동생과 인사하고 바로 2층으로 향했다. 좁은 계단을 돌아 올라가자마자 미국으로 순간이동한 듯 음악과 인테리어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미국 감성이었다. 약간 낡은 듯한 나무 의자와 알록달록하고 네모난 탁자. 미국에서 자주 볼 법한 폰트들로 꾸며진 유리와 스틸 소재의 문. 외국의 어느 도시를 연상하게 하는 기획은 이제 어디에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게 되어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날 버거샵의 기획은 기획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실내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 우주가 혹여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던 찰나에 야외 테이블을 발견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야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마음껏 우주를 돌아다니게 할 수 있었다. 테라스를 감싸는 오래된 나무의 그늘과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 오길 너무 잘했다고 외치면서!
우주와 버거를 맛있게 나눠먹고 지하철로 논현역까지 이동한 후에 6001번을 기다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2층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우주는 타자마자 내 품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보이는 풍경을 원 없이 누렸다. 양쪽에 높은 빌딩이 들어선 강남을 지나던 파노라마를 잊을 수 없다. 땅에 서서 바라보는 시선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버스들을 한참 구경하고 점점 초록빛이 짙어가는 산에 비친 노란 햇살도 눈에 담았다. 서방구의 퇴근 버스가 같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어 정류장에서 만나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우주가 엄청 늦게 잤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응가하느라고 한 시간 정도 깨어있었지 참.
금요일은 주말에 있을 캠핑을 위해 우주와 몸을 한껏 사렸다. 그래도 햇볕과 바깥공기를 마시는 일과는 중요하니까 아침에 유모차로 산책을 돌았다. 육교의 엘리베이터를 왕복하고 마트에서 우주 마스크도 사고 마지막으로 우체국에 들러 선글라스를 엄마 편에 택배로 부쳤다. 지난밤 응가 소동으로 늦잠 잔 우주는 내내 졸리면서도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버텼고 여러 번 재우기를 시도하다가 두시 반쯤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방으로 데려갔는데 다행히 잠이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나도 같이 잠이 들어서 둘이 세 시간을 내리 잤다. 그것은 우주의 밤잠이 11시가 넘도록 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역시 그의 밤은 길고 길었다. 우리는 무사히 기절을 물리치고 일어나 야식 같은 저녁식사를 하고 주말 캠핑을 위해 이것저것 정리했다. 그렇게 누워서 일기를 적다가 잠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캠핑장의 고요한 매너 타임 중에 있다. 밀린 일기로 고단하니 캠핑 이야기는 내일 남겨야겠다. 배가 내내 불편했는데 좀 전에 원흉을 약간 제거해서 속이 편안하다. 책 좀 읽다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