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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5월 29일 그늘 아래에서는 아직 괜찮다

20개월 22일

by 마이문

어제 오늘 다녀온 캠핑의 기억을 남겨야하는데. 아닌 밤 중에 찾아온 빡침으로 내게 남았던 온기가 열기로 바뀌었다. 굳이 누가 보태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는데. 눈치 없는 사촌동생이 잔잔하고 싶은 호수에 돌을 던졌다. 이 녀석아. 너 오늘 잘 걸렸다. 나는 대체로 싫은 소리를 피하는 편이다. 상대방이 불편하게 했더라도 내가 그것이 불편하지 않다고 나 자신을 속일지언정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싫은 소리를 부드럽게 하지 못하는 성미라 자칫하면 관계를 정리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는 폭탄을 던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말해서 알아 들을 일이라면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편한 얘기를 굳이 꺼내는 대신에 그에게 그럴만 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여기는게 여러모로 편하다. 그런데 오늘은 불편하다고 말을 해야만 했다. 오늘 밤은 넘기고 내일 아침에 카톡을 보내려고 했는데 자기 직전 서방구의 장난을 장난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전에 메시지를 전송했다. 화는 화나게 한 대상에게 내야하니까.


사건의 발단은 오늘 저녁 내 동생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앞서 말한 사촌동생이 근 두 달 사이에 몇번 만나자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내 동생이 시간이 안나서 계속 약속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오늘 저녁에 다시 한 번 연락이 온 것이다. 언니 집에 놀러올 때 만날 수 있겠냐고. 내 동생은 그 카톡을 보고 우리 집에 와야하니까 나에게 연락을 했고 나는 다같이 만나자는 줄로 이해했다. 동생은 11월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휴무인 월요일에 매주 스케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집에 올라오려면 한 너댓시간 보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그 주에는 쉴 수 있는 날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올라오겠다는 동생을 말리고선 내가 사촌동생에게 연락해서 우리가 대전으로 한 번 가자고 말해보겠다고 한 후에 전화를 걸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로 사촌동생은 내 전화에 당혹스러워 했다. 셋이 만나자는 의미가 아니었고 둘이 보자는 말이었는데 왜 이게 이렇게 받아들여졌는지 모르겠다며. 이런 저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하는 내 말에 일일이 토를 달면서 말이다.


전화를 끊고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가만 생각해봤다. 그래야만 했다. 왜냐면 내 삶에서 우주가 아닌 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0에 가까우니까. 기억을 더듬어 어디부터 문제였는지 찾아야만 했다. 처음에 사촌동생이 만나자고 했다며 나에게 보내준 동생의 카톡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날은 사촌언니가 우리집에 놀러왔던 날이었다. 가까이에 사는 사촌동생들에게 한 달 전에 미리 알려주었던 날이다. 스케줄이 어찌 될지 모르니 당일에 알려주겠다는 대답을 들었었다. 그 대답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달 전인데. 그렇게나 미리 말을 했는데도 시간을 빼겠다는 대답이 아니라면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서 오지 않겠거니 했는데 정말로 오겠다 말겠다는 연락조차 없이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전에서 내 동생이 올라오게 되었다. 저녁에 언니가 우리와 만나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사촌동생에게 오늘 잘 놀았냐고, 보고 싶다고, 곧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잊어버렸다,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그리고는 다음 날, 바로 어제 동탄에 다녀간 동생에게도 언제 동탄에 올라오냐며 오게 되면 따로 만나고 싶다는 카톡이 왔다고 했다. 동생은 따로 만나자는 카톡에 의아해서 무슨 일인가 했고 나는 별거겠냐고, 어제 만나기로 한 것도 잊었는데 날을 잡아도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몇 번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촌동생네 놀러가기로 두 동생과 다 얘기한 상태에서 집에 도착하면 집에 없거나 다른 약속이 있다며 나가기도 하고, 갑자기 보고 싶었다고 영상 통화가 걸려와서 내가 지금 놀러갈까 하고 물었더니 그러라기에 차를 몰고 출발했더니 다시 전화가 와서 다른 날에 만나면 좋겠다고 말한다던지. 약속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구나 나는 점점 그렇게 생각했었다.


오늘 밤 통화를 끊은 후에 내내 심장이 벌렁거리고 화가 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사촌동생이 나에게 준 불편함을 나는 여러 번 물러서서 참고 받아들이려 했는데, 둘이 보려던 것을 셋이 보는 줄 알았다는 사실 하나로 나에게 위 아래도 없이 따지던 게 괘씸해서다. 그리고 사촌언니가 오던 날 연락도 없더니 태연하게 보고 싶다는 카톡을 보냈었다는,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최근에 당했던 일들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지기 시작해서다.


내 동생에게 그랬듯 나에게도 몇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었다. 그러다 정확한 날을 잡았던 건 지난 목요일이었다. 약속을 잡아두고서 사촌동생의 동생 그러니까 그 친구도 내 사촌동생이긴 하지만 아무튼 둘째가 일하는 압구정에 선글라스를 사러 가기로 마음 먹은 후에 혹시 같이 가고 싶을까 해서 연락을 다시 했었다. 그러나 혹시 같이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니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과 함께. 후자의 답이 돌아왔고 원래 가려던 베이커리 카페에 가서 나랑 chill하고 싶다고 했다. 우주와 chill? 알면서 그냥 하는 말인가 싶어서 우주랑 같이 있으면 그러기는 쉽지 않겠지만 우주의 간식을 많이 챙겨가 보겠다며 우스갯소리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혹시 우주를 형부에게 맡기고 나올 수 있는 날이 있느냐는 질문이 훅 들어왔다. 우주를 낳고 단 한 번도, 아주 가까운 관계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애 엄마가 애를 누구에게 맡기고 나온다는 것이 어떤 노력이 드는 일인지 몰라서 하는 말일까? 나이가 서른인 동생에게 그걸 가르칠 수는 없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우주와 한 번 놀아주러 와준 적 없는 사람이. 어느 누구도 감히 달라고 하지 못한 내 자유부인 시간을 탐내고 있다니. 그런 건 주말에나 가능한 일이고, 그러려면 6월 중순 이후에나 가능한데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다시 날을 잡아보자는 답이 왔다. 이 친구, 진심으로 나만 나왔으면 좋겠구나. 방해받지 않는 대화가 하고 싶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렇게 또 한 번 약속이 변경되었다.


그때는 그럴 수 있던 일을 화로 바꾼게 오늘의 통화였다. 내 동생과 단 둘이 만나고 싶은 이유는 이랬다. 내 동생이 알게 모르게 자기를 불편해 하는 것 같고, 그래서 대화를 통해 풀고 싶다는 것. 그렇게 딥한 이유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런 말을 삼십대가 되어 오랜만에 듣고 있자니 낯이 여간 간지러운게 아닌데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근데 그건 그렇다 치자. 대화하고 싶은 주체는 사촌동생이다. 그런데 왜 내 동생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수고를 감수해야 하는 걸까. 나랑 우주 없이 편하게 대화하고 싶은 것도 사촌동생이다. 그런데 왜 나와 우주와 서방구까지 그 만남을 위해 수고해야하는 걸까. 이 모든게 자신을 위한 수고라는 걸 사촌동생은 알까?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는 동안 여간해서는 꺼내지 않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불편함을 풀고 싶어한다는 동생에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내가 이제까지 불편했던 일들을 나열했다. 풀고 싶은 대상은 내가 아니었겠지만. 듣고 보니 풀어야할게 나에게도 있는 듯 하여 그렇게 했다. 그리고 대화가 하고 싶을 때는 하고 싶은 사람이 움직이는게 맞다는 것과 아기 엄마에게 아기를 두고 나오라는 말은 굉장한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결국에는 가르쳤다. 사람 사이에는 저마다의 불편함이 있고 어느 정도는 그냥 그려려니 하고 감싸며 넘어가는 것도 잘 지내는 방법 중에 하나라는 것도 알려줬다. 그저 살아내는 것도 힘든데 가족끼리 무거워지는 건 하지 말자는 말도. 가볍게 지내자고 했다.


장난을 다큐로 받으며 정색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서방구에게는 미안하다고 짤막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사촌동생에게 카톡을 보내 둔 상태이지만 아직 답장은 없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 여전히 모르겠어서, 그래서 캠핑 이야기를 적지 못하고 주말의 끝자락,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이 일에 대해 쓰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내일은 잔잔한 호수로 지내고 싶다. 육아인에게 타인과의 감정 소모는 사치다. 우주에게 집중해야하는데. 일주일 스케줄을 정리하는 것으로 오늘의 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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