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개월 24일
5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틀 동안 사촌동생과 카톡으로 입 씨름 아니 손가락 씨름을 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쳤다. 도무지 사람 말 귀를 못 알아듣는데 그것도 동생이라고 나는 부지런히 정성 들여 답장을 해주었다. 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 그리고 둘째 동생 때문이다. 내가 그 사람들을 너무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최대한 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나는 적당히 가깝고 먼 관계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 동생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기적이고 똥고집에 싸가지까지 없는 행동이 보여도 조언과 충고는 이제껏 피해왔는데, 이번에는 봐주지 않을 작정이다. 이 일의 결말은 어디일까?
어제 사촌동생 때문에 화가 나서 내 동생에게 걸었던 전화를 엄마가 옆에서 듣고는 일을 마치고 한 달음에 우리 집까지 올라왔다. 이모들에게서 반찬을 잔뜩 받아 냉장고에 넣어주고, 우주와 놀아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사둔 시금치를 말끔히 씻어 손질해 주고, 부침개 반죽을 만들어 주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일을 하러 집으로 내려갔다. 좀 전에 씻으며 생각이 든 건데 나는 엄마 아빠에게 받은 것들의 발톱의 때만큼도 못 갚을 거다. 갚을 생각 말고 더 많이 표현해야 하는데. 이제는 좀 부드러워지자.
점심을 준비하려고 감자를 썰다가 내 손까지 같이 썰어버렸다. 정신머리가 딴 데 가있어 그렇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우주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까 싶어 오전 내내 맘에 걸렸는데 우주는 오늘, 마지막이 될 이앓이가 시작된 이래 며칠 만에 밥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기다란 선을 그리며 기차라고 말하고 고사리 손으로 펜을 잡고 뭔가 자글자글한 것을 그리더니 화살표라고 말했다. 얼음을 가지고 놀 때는 손에 물기를 머금고 손뼉을 치면 물방울이 얼굴에 탁탁 튀기자 비가 온다고 표현했다.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들썩 진지하게 춤을 출 때는 서방구와 자지러지게 웃었다. 우주는 오늘도 성장함으로 나에게 기쁨이 되었다. 우주 덕에 웃으면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들이 사라졌다. 너무 고마웠다.
동생이 나에게 너무 큰 용돈을 통장에 넣어주었다. 형부에게도 말하지 말고 요긴하게 쓰라고. 누리고 싶었던 걸 누리라고. 부모님께는 못 갚아도 동생에게는 갚아야 할 텐데 이것 참 큰일이다. 저번에 동생이 여유 자금이 생기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는데 생각이 잘 나지 않아서 당장 사고 싶은 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내 하고 싶은 게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 뭔가를 집에 두고 나왔을 때 드는 이상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우주도 재우고 내일 오실 시부모님의 충격을 덜어드리기 위해 화장대와 화장실의 선반을 말끔히 치우고 씻으러 들어가려던 찰나에 떠올랐다. 얼마 전 고향에 헤어숍을 낸 친구에게 축의금을 주고 싶었다는 걸.
단순히 10만 원 정도로 마음만 표현하고 싶지 않았던 친구다. 내가 머리 하러 갈 때마다 시술비를 안 받으려던 친구다. 결혼할 때 내가 어리고 돈이 없어서 5만 원만 축의 했던 게 내내 창피하고 마음에 걸렸던 친구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에 지출할 만한 자금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축하한다고 카톡 한 번 못하고 두 달이 흘러가고 있다. 그 친구가 떠오르자 마음에 폭죽이 터졌다. 바로 그거야! 방금 전에 구매하기 버튼까지 눌렀다가 망설임 끝에 결제하지 않고 창을 닫았던 가방이 아쉽지 않았다. 내일은 기쁘게 마음을 전해야겠다.
서방구의 긴긴 휴가가 내일부터 시작된다. 또 차곡차곡 우리 가족의 좋은 기억을 쌓아야지. 그러나 휴가가 끝나면 다시 돌아올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지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