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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6월 7일 비 내리고 흐린 제주

21개월 0일

by 마이문

어제 친구네서 낮잠도 안 자고 신나게 놀다가 저녁도 얻어먹고 씻고 옷도 얻어 입고 집에 오는 길에 기절한 것이 밤잠이 되어 그렇게 아침까지 내리 잔 우주 덕분에 우리는 수월하게 짐도 싸고 집도 정리하고 오래간만에 들어온 디자인 일도 하고 우리들의 블루스도 보고 아침을 맞았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으려 애썼던 제주 여행 첫날이 되었다. 생리가 찾아오기 일보 직전이라 배도 빵빵하고 머리도 멍하고 아무튼 컨디션이 영 꽝이었지만 3년 만에 오르는 비행길의 설렘은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마음에 가득 찼다.


우주에게는 아마도 이동에 가장 길게 시간을 쓴 날이지 않았나 싶다. 아침 10시 반에 집을 나서서 숙소에 도착한 5시 반까지, 7시간이나 차와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졸리기도 하고 들뜨기도 해서 텐션이 마구 올라가 있는 우주가 감당이 안됐는지, 서방구는 힘들어했는데 나는 오늘 우주 정도라면 아주 나이스 하다고 계속 얘기했다. 비행기에서 보이는 땅과 하늘 그리고 구름의 풍경보다는 창 덮개가 열리고 닫히는 것이 더 신기하고 흥미로운 우주를 지켜보는 게 재밌었다. 우주에게 렌터카를 소개해주자 새로운 차와 새로운 카시트가 좋았는지 계속 이것저것 뜯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으니 이 여행이 어떤 부분은 우주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서방구와는 201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제주도에 왔었다. 만난 지 4개월쯤 되었을 때였나. 제주에 도착해서 숙소로 오는 길에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길 뭘 믿고 따라왔냐며 놀리듯 묻는 서방구에게 나 자신을 믿었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좋아하니까 따라갔던 것 같다. 결혼해서 다시 오리라고는 우리 둘 다 그때는 몰랐다. 아들을 데리고 올 줄도.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은 아기와 셋이 함께 하는 여행도 둘이 했던 여행들 보다 더 큰 만족이 있다는 것. 이제 막 세 글자 단어도 따라 하기 시작한 우주가 종일 곁에서 우리말을 복붙 하고, 알 수 없는 말로 종알종알하고 있으니 여행 그 자체로 누리는 기쁨에 플러스알파까지 얻었다.


걱정이 전혀 안 됐던 건 아니다. 식당에 가서 같이 밥 먹으려면 분명히 한 명만 앉아있고 다른 한 명은 우주가 가자는 데로 따라다녀야 할 테고, 우주는 조금만 걷다가 자주 안아달라고 하니까 누군가의 팔은 남아나지 않을 테고. 쉼과 여유 없는 여행을 어떻게 여행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그러다 엊그제 밤, 설거지를 하다 문득 떠올랐다. 5일 동안은 설거지랑 안녕이다! 청소기랑도, 세탁기와 건조기랑도! 그렇다. 육아인에게 여행이란 집안일과의 안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밥 먹다 말고 우주 따라다니는 것쯤이야. 안아달라면 계속 안아주지 뭐.


여행의 의미를 찾은 다음에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난 한 달간 우주와 버스로, 기차로 짧은 여행들을 해 본 후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나는 우주와의 여행에 많이 단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주와 서방구가 이제는 완전히 친해져서 또 다행이었다.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몇 술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주에게 서방구가 자판기에서 동전을 넣고 뺄 수 있도록 놀이를 찾아주어서 우리는 그렇게 교대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우주를 위해 공깃밥을 하나 따로 주문하자 뭘 더 시키냐며 있는 걸로 된다고 하시더니 아기 먹을 미역국과 밥을 따로 주셨다.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시고 쿨하게 친절과 배려를 두고 가셨다. 우리는 먹는 내내 감동했다. 아마도 일정 내에 또 갈 것 같다.


오늘도 낮잠을 제대로 못 잔 우주는 야식으로 먹을 닭강정을 사러 밤마실에 나갔다가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적은 빛에 의지해 제주감귤 막걸리와 닭강정을 먹고 창가에 앉아 노래를 듣다가 서방구도 우주를 따라 곯아떨어졌다. 더할 것 없이 좋은 밤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까지 모든 게 감사하다. 무엇보다 우리 셋이 모두 무사히 여기까지 도착했으니. 나도 슬슬 잠이 온다. 그래도 어제 못한 월요 묵상은 꼭 하고 자야지. 내일 조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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