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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6월 8일 시원하다가도 추운 바람의 제주

21개월 1일

by 마이문

긴긴 하루였다. 다 기록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뭐라고 써야 잘 썼다고 미래의 나에게 소문날까? 아마 쓴 만큼만 기억할 테니 뭐라고 써도 칭찬해줄 것이다.


아침 10시에는 가족사진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친한 언니가 가을에 제주에서 스냅으로 가족사진을 남기려고 한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시간도 가격도 괜찮은 작가가 있나 찾아보려 했는데 인스타를 안 하니까 그런 거 찾기가 너무 번거롭고 힘들어서 포기했었다. 그러다 서방구가 이번 휴가에 꼭 새로운 증명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어쩌나 고민하길래 그럼 제주의 예쁜 사진관을 찾아 가족사진도 남기고 증명사진도 찍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후기 사진을 찾다가 뒷 배경이 흰 천으로 가려진 틈으로 오래된 나무 천장도 슬쩍 보이고 내가 좋아하는 전등갓이 포인트로 내려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마음을 정했다.


조식은 구성이 너무 적어 조합해서 먹을 만한 음식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는데 입에 넣자마자 너무 맛있어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우주가 꿀잠을 오래 자는 바람에 너무 늦게 식사를 마쳐서 부랴부랴 준비하고 사진관으로 향했다. 조금 늦어서 죄송했다. 졸음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한 우주와의 정신없는 촬영이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미소를 보여주어 예쁜 컷을 몇 개 건질 수 있었다. 사진을 기다리며 지루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주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침햇살이 드리워진 골목을 감상했다. 사진이 예쁘게 잘 나왔다. 가뜩이나 넓은 내 얼굴이 붓기로 빵빵해져서 원본을 보고 걱정했는데 조막만 한 얼굴로 다듬어주셨다. 기적이다.


돌아와서 우주는 바로 낮잠에 들어갔고 서방구는 그 곁에서 아이패드로 나는솔로를 시청했다. 나는 호텔 지하에 있는 코인세탁실에 빨래를 넣어두고 1층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테라스에 앉아도 되는지 여쭈니 8층 루프탑을 이용하면 훨씬 좋을 거라고 추천해주셨다. 세탁기가 끝날 때까지 잠시만 앉아서 책을 읽으려던 계획이라 8층에 올라가기가 조금 귀찮긴 했지만 추천까지 해주셨는데 안 가기도 뭐해서 다시 내려오더라도 한 번 가보기로 했다.


8층에 올라서자 객실에서 창문 만하게 보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컨테이너로 만든 공간에는 음식과 음료를 판매했었는지 아니면 하려다 못했는지 모를 조악한 조리대와 업소용 냉장고가 있었고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앞쪽 야외에는 어지러운 무늬가 가득한 흰색 테이블과 의자가 줄지어져 있었다. 공간만 보면 잠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제주의 바람도 있고 바다도 있었다.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한 번 씩 고개를 들어 바다 풍경을 들이마셨다.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있을까. 그런 순간에는 아쉬움이 먼저 들어 큰일이다.


우주는 건조기까지 다 돌리고 배달시킨 버거를 받은 후에야 눈을 떴다. 식사도 역시 루프탑에서 해결했다.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모두 분리배출하도록 쓰레기통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배불리 먹고 깔끔히 정리까지 할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그리고는 우주가 사랑하는 기차를 마음껏 탈 수 있는 에코랜드로 향했다. 한라산과 가까워지자 먹구름이 잔뜩 하고 비가 내리는 곳도 있었다. 다행히 에코랜드에 도착해서는 바람만 많이 불고 비는 오지 않았다. 분명히 여행 출발 전에 긴 팔에 반바지를 입으면 딱 좋을 것 같다고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내가 챙긴 옷은 죄다 반팔에 긴 바지였다. 팔에 닿는 바람이 엄청 차가웠다.


차에서 내내 지루해했던 우주는 기차를 보고선 '내가 이걸 타려고 그 고생을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에코랜드에서의 두 시간 동안 우주는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텐션이 한껏 올랐다. 특히 합판으로 만든 작은 집과 자동차를 모아둔 키즈존에서는 지칠 줄 몰랐다. 집 내부가 디테일하다던지 대단한 놀이기구가 있다던지 아니면 자동차에 핸들이라도 달려있다던지 그랬다면 이해가 됐을 텐데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갔던 집을 또 가보고 탔던 차를 또 타보면서 행복해했다. 기차를 타야 한다고 우유를 먹으러 가자고 꼬셔서 겨우 데리고 나왔다.


제주의 바람을 한껏 맞은 우주는 피곤했는지 차에서 곤히 잠들었다. 우주가 잠들었으니 아무 걱정 없이 풍경을 누리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여기에 오면 이동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 해도 용서가 된다. 달리다 보면 드넓은 목초지가 등장하다가 양쪽에 높은 가로수들 사이를 지나가기도 하고 언덕인 줄 몰랐는데 갑자기 내리막이 시작되며 가늠도 할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오름이 장관처럼 펼쳐진다. 그뿐인가. 대로에서도 양쪽으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집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오래된 가게와 새로 지은 신식 건물이 교차로 등장할 때면 그 동네의 지난 세월을 상상해보는 게 재미다. 한창 공사 중인 숙박시설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제주도의 길에서만 할 수 있다.


저녁은 흑돼지를 먹게 됐다. 이번 여행의 메인이자 주목적은 서방구의 학회 참석인데, 전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형과 친구도 학회를 위해 오늘 도착해서 중문에 숙소를 잡았다고 들었다. 친구는 사실 직장 동료이기 전에 서방구의 초딩 친구다. 게다가 다른 형도 나와 안면이 없는 사이가 아니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지 묻기에 좋다고 했다. 진짜로 좋아서 좋다고 한 건데 형과 친구는 그래도 나에게 계속 미안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아줌마가 되어 넉살이 좀 늘었다고 해도 여전히 소심한 나는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행히 우주가 내내 아기 의자에 잘 앉아서 된장국과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우리 셋만 있었으면 벌써 일어나 나가겠다고 했을 텐데. 어른들이 다 앉아있으니 자기도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노력해보는 듯했다.


신이 나서 술을 마신 서방구 대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아까 차에서 짧은 낮잠을 챙겨 자는 바람에 우주의 밤은 길었다. 덕분에 우리는 2차로 과자와 맥주를 먹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렴 어떤가. 오늘도 꽉 차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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