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월 2일
아침에 일어나 암막커튼을 걷으니 푸른 하늘로 창이 가득 차 있었다. 조식 메뉴를 훑어보다가 스크램블 에그와 토마토소스를 발견하자 어제의 불만족이 비단 메뉴 가짓수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조식에 오믈렛이 없어서 슬펐던 것이다. 토마토소스 위에 스크램블 에그를 올려 셀프로 오믈렛을 만들어 먹고는 이 호텔의 조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내일도 나오려나. 안 나오겠지.
조식을 먹고 지하의 부대시설을 둘러보았다. 우주에게 작은 키즈카페를 소개해주고 서방구는 오래간만에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도 몇 곡 뽑았다. 오락실의 자동차 게임도 조금 해보고 다시 객실로 올라왔다. 우주가 졸린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서 재워보다가 실패하고 점심 전에 루프탑 수영장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행성이 그려진 우주의 수영복을 사둔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개시했다. 운전대가 달린 튜브도 마찬가지. 우주는 다행히 물이 싫다고 하지 않았다. 튜브에 앉아 발도 구르고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한참 앉아있으려니 지루했는지 나오고 싶어 하길래 꺼내서 안아줬는데 그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저 나름대로 물을 즐겼다. 우주가 행복해서 우리도 행복했다. 물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짧은 수영을 마치고 덜덜 떠는 우주를 얼른 데리고 내려와 따뜻한 물에 씻겼다. 바나나 우유를 원샷하고 나랑 둘이 세탁실에 가서 빨래도 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응가도 성공했다. 그러고는 맘 편히 깊은 낮잠에 들어갔다. 나도 따라 가려다가 세탁 종료 시점에 맞춰둔 워치 알람에 일어나 건조기로 세탁물을 옮기고 돌아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렸다. 사촌 언니가 연말에 부탁했던 캠핑 그림이다. 큰 딸 생일 선물로 주겠다고 했던 건데 아직도 미완성이다. 도무지 엉덩이 붙이고 앉아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는데 왠지 여기에 오면 우주가 자는 동안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이패드를 챙겨 왔다. 그 사이 건조기도 끝나서 빨래를 챙겨 루프탑에 또 올라갔다. 어제처럼 풍경을 먹으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고지가 눈앞에 보인다. 제주에서 무조건 완성해야지!
오늘 점심도 배달로 루프탑에 앉아 해결했다. 메뉴는 물회와 회덮밥과 생선구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우리 셋이서 편하게 밥을 먹었다. 제철 생선구이가 맛이 좋아 우주도 잘 먹어주었다. 물회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내일 또 먹어야지. 서방구는 너무 맛있어서 기어기 과식을 하고 말았다. 먹은 자리를 말끔히 치우고 호다닥 외출 준비에 돌입했다. 목적지는 산방산 근처의 오션뷰 카페였다. 바로 가면 40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해안가로 달리고 싶어서 돌아 돌아갔더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산방산에도 들렀다. 7년 전 우리가 왔던 곳이다. 산 아래 카페와 핫도그 집도 그대로였다. 저 아래 바닷가에 커다란 배가 생각보다 멀리 있어 내려가 볼 생각이 1도 들지 않은 지금의 우리는 '그때는 거기도 보러 다녀왔었는데 우리 참 젊었다.'며 폭소했다. 저 먼델 도대체 어떻게 다녀온 거야?
강풍에 정신이 희미해져 마스크를 벗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아쉬운 가족사진을 몇 장 남기고 카페로 향했다. 전면의 커다란 창이 바다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 창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 앞의 바다가 다 내 거라고 생각하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카페의 이곳저곳이 궁금한 우주와 3층에도 올라가 보았다. 포토존으로 마련한 직사각형 창문과 루프탑, 그리고 뒤편에는 산방산이 보이는 창도 있었다. 어느 곳에 앉아도 제주의 풍경을 맘껏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빵과 커피를 맛있게 먹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파도를 우주에게 설명해주자 우주는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했다. 조금 차가운 강풍이 불어서 나와 우주를 걱정하는 서방구는 말렸지만 제주까지 와서 바다 한 번 가까이에서 보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결국 모두를 데리고 바다 앞으로 나갔다. 조금 더 크면 해보자는데, 나중이 어딨다고!
서방구 말에 의하면 거기도 우리가 앉아 사진을 남기던 곳이라고 했다. 오늘은 아들까지 셋이 나가 바다를 즐겼다. 우주는 밀려오는 하얀색 파도가 신기해서 더 가까이에 다가가 만져보고 싶어 했다. 운동화를 신은 서방구 대신 내가 나섰다. 결국 우주와 나의 발과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래도 재밌었다. 얼마나 신기할까? 오늘 느낀 파도의 촉감과 소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우주의 마음 어딘가에 조금의 울림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찬 바람에 피곤했을 우주는 조금 꿍얼대다 잠이 들었다. 어제 먹으려다 실패한 중문의 조개집으로 향했다. 지는 해가 넓게 펼쳐진 산등성이를 비추어 고독한 일렉기타의 선율이 어울릴 것 같은 저녁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제주에 살고 싶다고 느끼게 하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 풍경이 아닐까. 뾰족하게 우뚝 솟아오른 산과는 확실히 다른 아우라가 있다. 분명히 장관인데 스스로 뽐내지 않으니 보는 내 마음도 흥분되기보다는 차분해진다. 식당에서 서방구는 조개찜과 볶음밥을 포장해왔다. 기다리는 동안 작은 소품 가게에 들러보려 했는데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내일 다시 들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주는 숙소에 거의 다 왔을 때 잠에서 깼다.
해가 이미 많이 넘어간 터라 루프탑에 올라가지 않고 객실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조개 술찜과 우주를 위해 산 게살볶음밥은 둘 다 맛있었다. 맥주를 한 캔 씩 따고 식사를 즐겼다. 우주도 배가 바가지처럼 부르도록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대로 잤다가는 배 아파서 깰 것 같아 옷을 입혀 산책을 나섰다. 잠깐 걷고 돌아와서 아침에 들렀던 키즈카페와 노래방이 떠올랐는지 지하에 내려가자고 했다. 몇몇 아이들이 아직 놀고 있었다. 아침엔 아무도 없어서 그랬는지 조금 둘러보다 말더니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으니 자기도 신이 나서 계속 있겠다고 했다. 한참 가자고 해도 안 간다더니 본인이 만족하고 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우주는 그런 아기다. 일단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 더 하래도 하지 않는다.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매번 어려워서 문제지.
아침 수영 후에 세 식구 모두 샤워를 했으니 밤에는 간단히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내가 먼저 잠들었던 것 같다. 우주는 한참을 뒤척인 모양이다. 내 발아래까지 내려가서 잠든 우주를 올려두고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는데 두 시가 못되어 눈이 다시 떠졌다. 덕분에 일기를 남긴다. 내일은 마지막 여행날이다. 우주와 단 둘이 보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뭘 할까?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