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6월 18일 덥지 않아서 좋았다

21개월 11일

by 마이문

맥주 한 모금에 오늘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약간은 무모하고 맥락 없는 여행길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오늘은 동생의 남친, 그러니까 나의 예비 제부가 5개월의 중국 출장을 마치고 입국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내일모레 월요일에는 내가 친언니처럼 생각하는 언니네 가족이 캐나다에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오는 날이다. 나는 공항도 좋아하고 공항에는 우주가 좋아하는 엘리베이터도 많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격스러운 입국에 환영을 보태고 싶어서 2박 3일의 인천 여행을 기획했다. 그리고 인천에 사는 친구에게도 시간이 괜찮은지 미리 연락해두었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일정이 틀어진 건 엊그제 일이었다. 캐나다에서 오는 언니에게 도착이 월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이라는 문자가 와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잠들어서 이튿날 새벽에 확인하게 되었다. 1박을 취소하려 예약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아뿔싸, 내가 문자를 잠들지 않고 봤다면 취소가 가능했을 텐데 이미 자정이 넘은 뒤라서 환불이 불가한 상태가 돼버렸다. 거기다가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오전에 두 번 만나자고 했던 친구에게서도 주말에 출근하게 되어서 토요일에만 만날 수 있겠다는 연락이 왔다.


거기까지는 다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여행을 기획한 이유도 혹시 모를 일정 변동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였으니. 아무튼 가기로 했다. 원래는 서방구에게 주말의 자유를 주고 우주와 둘이 가려고 했는데,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길래 오늘의 여정에만 함께 해달라고 했더니 한참 고민하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저녁에 친구를 나 혼자 만나고 올 테니 우주를 맡아줬다가 내가 돌아오면 서방구는 지하철로 집에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였다. 지하철이라 몇 분마다 한 번씩 오는 줄 알았더니 서방구가 가려는 망포역에 서는 열차는 9시에나 온다며, 그때 타서 언제 집에 가냐고 그냥 여기 있겠다고 했다.


여기에 와서 생긴 몇 가지 변수들을 고려해본 후에 우리는 내일 아침만 먹고 남은 1박은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변수 하나는 조식이 없다는 것. 분명히 예약 사이트에 조식 정보가 나와있었는데 체크인할 때 조식을 신청하려고 하니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웬만한 변수는 다 감수하는 편인데 이건 좀 화가 많이 났다. 그래도 따진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숙박 이용 후기에나 남겨야지 하고 말았다. 아기와의 여행에서 조식은 아주 큰 변수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다른 걱정 없이 밥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변수는 호텔 주변 환경이 정신없다는 것. 여기는 그야말로 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술과 안주를 먹으러 오는 관광지였다. 유흥업소가 밀집되어있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웅웅 들려온다. 우주가 없었다면 상관없지만 우주와는 밤 산책 나가기도 조심스러운 이곳에서 하룻밤 더 지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변수는 결국 나는 여기에 와서 하려던 걸 다 했다는 것. 공항에 깜짝 게스트로 나가 예비 제부를 맞이했다. 중국에서 내내 이발하지 않아 장발이 되어 온 제부는 내 동생만 저 멀리서 알아보았다. 제부의 어머니도 긴가민가 하시는 바람에 나도 맞나 아닌가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도 굶지는 않았는지 덩치가 많이 커져있었다. 이제 한 열흘 뒤면 웨딩 촬영하러 가야 하는데. 빡시게 관리하려면 힘 좀 들겠구나 싶었다. 우주도 처음에는 누군가 하더니 나중엔 기억의 퍼즐이 딱 맞았는지 제부 품에 가서 같이 놀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이모를 만나 행복한 시간도 만끽했다.


인천에 사는 친구는 5년 만에 만나는 거였다. 고 3 때 같은 반이어서 친했던 친군데 내가 마음의 빚이 많다. 연락 없이 지내다가 20대 초반에 먼저 나를 찾아줬던 친구다. 친구는 내 결혼식에 와서 축하를 보내줬는데 그 친구 결혼식에는 토요일에 빵집 문을 열어야 했어서 나는 가지 못했는데도 조금의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이해해주었던 친구다.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마음에 내내 남는 그런 친구다. 만나지 못한 세월이 5년이나 되었는 줄은 우리 둘 다 몰랐다. 너무 어제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는 방식도 상황도 달랐지만 그저 좋았다.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바쁜 시간 쪼개어 내준 것도 고마웠다. 우주 때문에 일찍 돌아가야 해서 너무 아쉬웠다. 다음엔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그때는 더 여유로왔으면.


호텔에 돌아오니 우주가 달려와 나를 반겼다. 그 모습은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 내 마음이 순식간에 사랑으로 가득 차 버린다. 아빠와 둘이 호텔방에 박혀있느라 지루했을 것 같아서 씻기고 간식을 먹이고는 둘이 산책에 나섰다. 술 취한 사람들로 시끄러운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 소래포구에 도착했다. 물 비린내가 바람에 실려왔다. 광장에는 밤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주가 간식을 많이 먹어서 좀 걷게 하려고 했는데 며칠 전부터 바닥의 개미가 무서워서 도무지 땅을 밟으려 하지 않더니 오늘도 역시나 몇 걸음 못가 안아달라고 했다. 품에 안고 바다 바람을 쐬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우주는 한참 잠 못 들더니 본인이 카트 미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들뜬 마음을 진정하고는 스르르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맥주로 긴장을 풀며 오늘을 정리하고 있다. 여행은 여행지와 정들어야 충만해지는데. 이번 여행은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은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아마도 내 인생에 소래포구는 두 번은 없을 것 같다. 유미의 세포들 3화가 떴을 테니 보다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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