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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Jun 25. 2022

22년 6월 24일 생각보다 시원했던 날

21개월 17일

어제 폭우를 뚫고 대전에 내려왔다. 차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운전해본 적은 처음이다. 내리치는 빗줄기가 어찌나 세었는지, 차창에 떨어지면서 퍼지는 비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오지 않았다면 훨씬 더 무서웠을 거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저녁에는 캐나다에서 온 친한 언니네 식구들과 번개로 만났다. 언니는 20대 초반에 교회에서 만났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무튼 급속도로 깊게 친해졌다. 나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보석처럼 여겨주던 언니다. 3살이나 많은데도 대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언니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로 아픈 일에 늘 함께여서 같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20대를 추억하면 언니 빼고는 말할 게 별로 없을 정도다.


코로나 시국 때문에 3년 만에 만나는 건데 어제 본 것 같았다. 어제 본 것처럼 가볍게 인사하고 가볍게 떠들었다. 사랑하는 조카들은 그새 많이 자라 있었다. 특히 첫째는 나에게 각별한데, 아직 포켓몬 이야기라면 나와 대화를 나눠줄 의지가 충분한 듯 보여서 감동이었다. 언젠가는 나를 반가워하지 않을 날이 올 테니. 나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은 날이 올 테니. 다음에 만날 때까지 포켓몬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겠다.


우주와 동생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언니가 한국에 있다니. 언니는 나의 자존감 지킴이다. 내가  하든 관심이 많고  하든 중요하게 봐줘서 그렇다. 살다가 만나는 사람이  명이라면 그중의  명은 나를 그냥 좋아하고, 다른  명은 나를 그냥 싫어하고, 나머지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언니는 나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다. 언니를 만나고   마음이 충만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우주가 늦도록 잠을 자려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크게 동요하지 않고 그저 엄마 집에서의 시간을 누렸다. 동생이 사준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다. 우주가 더워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한 시간을 무리 없이 받아냈다. 커피 때문에 소화가 되지 않아서 한참 유튜브를 보다가 세 시가 다 되어 잤는데 우주가 너무 더웠는지 네 시쯤 깼다. 다행히 동생이 출근하기 전까지 우주를 봐줘서 나는 더 잘 수 있었다.


온 식구가 모두 출근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우주와 아침을 챙겨 먹고 고민에 빠졌다. 시댁에 바로 갈 것인가, 낮잠까지 재우고 늦게 갈 것인가. 원래는 시댁 가면 우주가 나에게 매달려있기만 해서 오히려 더 피곤했었는데 시부모님께서 우리 집에 다녀가신 뒤로 우주가 내적 친밀감이 상승했는지 제법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다. 손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집을 정리하고 씻고 장을 보고 시댁으로 출발했다.


오는 길에 잠들려고 시동 거는 우주에게 말을 마구 걸어서 잠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잠들면 낭패다. 점심시간도 틀어지고 쪽잠 같은 낮잠을 자버리고 나면 종일 짜증 낼 것이 분명하니까. 작전은 성공했고 우주가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랑 재밌게 놀아주어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배불리 먹이고 종일 노래 부르는 엘리베이터를 한참 타고 돌아와 낮잠을 잤다. 나도 곁에서 기절해버렸다.


세 시간이나 푹 자고 일어나 과일과 우유로 배를 채우더니 기특하게 응가 타임을 가졌다. 회의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서방구는 오늘 퇴근이 늦었다. 창원에서 대전역으로, 대전역에서 신탄진으로 넘어오니 7시 반이었다. 어머님이 맛있게 만들어 주신 백숙으로 저녁을 든든히 먹었다. 국물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고 고추장아찌가 일품이었다. 닭이 얼마나 실했는지, 크기가 평소에 마트에서 사던 닭다리의 두배였다.


우주는 안 잘 것처럼 신이 나서 늦게까지 뛰어다니더니 침대에 다 같이 누워서 두런두런 나누는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스르르 잠들었다. 내 장기는 내가 열심히 밀어 넣은 맥주와 치토스를 소화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엎드려 일기를 쓰는 동안 더부룩한 속이 많이 내려갔다. 일기를 매일 쓰니까 지금 속이 내려가는 것처럼 생각의 정체가 없어서 좋다. 매일 뭔가를 풀어내서 그런가 보다.


내일 우주가 먹을 세끼 식사도 모두 마련해두었으니 참으로 편안한 밤이다.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야지. 내일도 시댁에서 자는 거 아니냐는 말 같지도 않은 서방구의 질문 때문에 열받을 뻔 하긴 했지만 위기를 넘겼다. 요즘 생각이 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스트레스가 많은가? 뭐가 문젠지 유심히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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