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월 20일
우주는 이모와 함께 하는 밤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자꾸 늦게 잔다. 그리고 또 얼른 이모를 만나고 싶어서 일찍 일어난다. 그러니 엄청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도 대충 먹고 아홉 시에 다시 잠들었다. 오늘은 할머니 댁에 가기로 한 날이다. 우주가 열두 시까지 푹 자는 바람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점심도 못 드시고 목 빠지도록 우리를 기다리셨다.
할아버지는 역시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1층에 내려와 서 계셨다. 날이 춥거나 더울 때는 절대 나오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하는데도 소용이 없다. 아무도 못 말린다.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공기에 우렁 된장찌개와 조기 다섯 마리를 클리어했다. 할머니는 내가 많이 먹는 모습을 봐야만 만족하신다. 원하는 만큼 먹지 않으면 그릇에 밥을 더 덜어줄 타이밍만 기다리며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그러니까 받은 만큼은 꼭 다 먹어야 할머니를 위한 효도가 완성된다.
늘 우주와 나 둘이서만 할머니 댁에 갔었는데 오늘은 동생도 함께 했다. 덕분에 우주가 즐겁게 있을 수 있었고 할아버지와 둘이 은행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졌다. 그러다가 은행에 갈 수 없어서 미처 정리하지 못 한 통장 이야기가 등장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이제는 자주 깜빡깜빡하셔서 돈 뽑으러 다녀오시는 것도 어렵게 됐다는 말도 이어서 하셨다. 할머니는 나에게 직접 부탁하는 대신에 이야기보따리에 통장 이야기를 슬쩍 넣으셨다.
할아버지랑 은행에 좀 다녀와달라는 말을 왜 못 하셨을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차 타러 내려가는 길에 할아버지는 그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잊으셔서 은행이 아니라 인출기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셨다. 차를 왜 타냐고 하셨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시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은행에 가서 통장을 새로 발급받고 할머니가 부탁하신 생활비와 동생 축의금도 출금했다. 나에게는 정말 정말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다시 돌아와 자두를 실컷 먹었다. 하나에 900원이나 하는 비싼 자두였다. 우주 간식에 진심이셨던 할아버지가 사두신 사랑 넘치는 과일이다. 우주가 졸려하기 시작해서 집에 가기로 했다. 우주는 밖에 나간다고 하니 얼른 인사를 드리고는 나가자고 했다. 문을 나서서 엘베를 향해 신나게 걷던 우주는 문 앞에서 우리에게 인사하는 할머니에게 다시 쪼르르 달려가 손 인사를 다시 건넸다.
마음이 찡 했다. 옛날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우리가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셨다. 우주가 다시 할머니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생각이 났는데, 나는 한 번도 다시 돌아가 본 적이 없다. 우주는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나와 비교도 안될 만큼 적은데 나보다 더 진하게 할머니를 감동시켰다. 할머니는 오늘 우주가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으셨다. 웃을 일이 없는 데 우주 때문에 젊어지는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또 같이 오자고 했다. 더 열심히 더 자주 그렇게 해야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곯아떨어진 우주를 데리고 한 시간 정도 움직였다. 신세계에서 인생네컷을 남겼다. 다시 아울렛으로 넘어가 퇴근한 제부까지 조인해서 저녁도 먹었다. 아웃백에 두 달 만에 온 것 같은데, 그때는 동생이 우주를 따라다니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그새 우주가 많이 자라서 오늘은 제법 앉아서 식사도 하고 가진 물건으로 재미도 찾으며 모두가 다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우주와 동생과 제부 덕분에 생에 첫 토마호크를 원 없이 먹었다.
사고 싶은 바지가 있어서 우주를 맡겨두고 바지를 찾아 헤매다가 다시 돌아가 보니 역시나 이모로부터 새 모자와 강아지 풍선을 얻은 우주가 한껏 들떠서 방방 거리고 있었다. 그 커다란 아울렛에서 차와 가장 가까운 엘리베이터를 찾는 행운도 얻었다. 다 같이 집에 돌아오는 길이 참 좋았다. 이럴 땐 정말 가까이 살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마구 샘솟는다.
오늘 많이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주는 열한 시가 넘어서 어렵게 어렵게 잠이 들었다. 어제와 그제는 나도 같이 기절했는데, 오늘은 커피에 블랙티까지 마셔서 말똥말똥했다. 일기도 쓰고 유미의 세포들도 본다. 오매불망 새 에피소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말 내내 즐겁게 노느라고 완전히 잊었다. 최강야구도 오늘 했을 텐데! 이렇게 볼거리가 쌓여있으면 공짜로 좋은 걸 얻은 기분이다. 찬찬히 봐야지.
내일은 별다른 스케줄 없이 우주와 둘이 보낸다. 우주의 피곤함을 좀 달래줘야지. 장 봐서 맛난 것도 만들어줘야겠다. 따뜻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