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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Jul 06. 2022

22년 7월 5일 마닐라랑 꼭 같은 날씨

21개월 29일

어제, 그러니까 동생 웨딩 촬영이 있던 날, 우주는 우리 엄마, 아빠와 아침부터 오후까지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 깨서 우는 바람에 늦잠 자는 우주를 그냥 두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는데, 영문도 모른 채 집에 남겨진 것이 서러웠는지 아니면 약간의 충격이 있었는지 집에 돌아오니 나를 본체만체했다. 이모에게 달려가 안기더니 잠잘 때까지 내가 불러도 나를 흘끔 보다 말거나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그러고는 아쉬움에 몸부림치다 겨우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성통곡을 하며 새벽 두 시에 일어났다. 이미 우유를 한 컵 먹고 잤는데 또 달라고 해서 물을 대신 주고 진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대로 내버려 뒀더니 네 시반이 되었다. 결국 우유를 마시고서야 다시 잠들었다. 우주가 다시 잠들길 기다리는 동안 짐 싸서 그냥 집에 올라갈까 하는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짐이 조금이라도 정리되어 있었다면 그대로 챙겨서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여기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정확히 반반이다. 우주 낮잠 시간을 이용해서 빨래를 개고 우리 옷은 따로 모아 짐을 정리했다. 언제라도 망설이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간밤에 한참 깨어있느라 피곤했는지 우주의 낮잠은 3시간이나 이어졌다.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있으면 저렇게 피곤할 일은 없을 텐데. 나 좀 편하자고 우주가 너무 힘든 게 아닌가.


해결하지 못 한 걱정은 불안을 키우고 불안은 내가 알게 모르게 예민해지는 요소다. 우주를 걱정하면서도 우주의 짜증을 부드럽게 받아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되새기면서 받아내던 것을 여기서는 한 번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우주를 다그쳤다. 그러지 못하도록 더 단호하게 대한 일도 많았다. 그렇게 갈 곳 잃은 불안은 집에 가야 풀릴 것만 같았는데 놀랍게도 우주가 잠재웠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 동생 빵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주가 처음으로 '행복해.' 하고 말했다.


다른 단어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믿기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말한 게 맞는지 계속 다시 확인했다. 우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긴장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불안이 한 순간에 싹 가셨다. 행복하다는 기분을 어떻게 아는 걸까? 지금에서야 궁금하다. 엄마, 아빠까지 모두 모여 오랜만에 네 식구가 외식도 하고 낮잠이 길었던 우주의 밤이 쉽게 오지 않을 듯해서 몸 쓰게 해 주려고 마트에도 들렀다.


아파트 입구에서 우주와 엄마를 먼저 올려 보내고 지하에 주차했다. 옛날 아파트라 주차장과 아파트 건물이 연결돼있지 않아서 매번 올라오는 게 귀찮았는데, 오늘은 그 길도 아름다워 보였다. 경사진 주차장 입구를 따라 걸어 올라오며 보이는 하늘과 물기 잔뜩 머금은 여름밤의 바람을 가만히 맞았다. 우주가 행복하다 하니 모든 시름이 잠재워지는구나. 여기 며칠 더 있어도 되겠다 생각하며 안도했다.


우주가 감정을 단어로 정확히 표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고 '행복해'는 두 번째다. 낮잠 전에는 내 물음에 '좋아!'라고 답했었다. 그리고 이모와 보내는 밤이 끝날까 아쉬워 버둥대다 겨우 몸을 누이 고선, "햄미미, 지베가고!' 라고 외쳤다. 처음에는 뭐라는 건지 몰라서 웃기만 했다. 우주는 못 알아듣는 우리에게 재차 같은 말을 외쳤다. 아! 내가 잠자리에 누워 자주 불러주던 노래의 첫 가사였다. 동생이 뽀로로 자장가 중에 가장 좋아한다고, 오래전에 우주에게 영상을 보여줄 때마다 말했던 노래였다.


해님이 집에 가고 깜깜한 밤이 오면. 자장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동생과 내가 같이 부르자고 말하자 꽤나 열심히 박자를 맞추며 우주도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가사를 말하며 노래도 부르다니. 오늘 우주 덕에 몇 번이나 감동에 젖는지 모른다. 우주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길이 1차선 더 늘었다. 우리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구나. 우주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많다. 우주의 마음을 언어로 담게 된 오늘을 잊지 말아야지. 이 감격이 날카로운 나를 덮어 둥글게 만들었던 순간을 꼭 기억해야지. 나는 오늘도 우주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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