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문 Jul 13. 2022

22년 7월 12일 에어컨 없이도 괜찮았다.

22개월 5일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드디어 우주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주가 깨어있을 때 같이 생활하고 잘 때는 같이 쉴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를 집안일에 초청하는 일! 설거지나 요리가 늘 문제였다. 우주는 1분도 혼자 기다리는 법이 없었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 항상 우주가 자는 시간에 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러니까 잠시도 쉬지 못하는 루틴이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러닝 타워가 눈에 들어왔었다. 아기들이 올라서서 설거지나 요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인데, 생김새나 쓰임을 생각하면 가격이 너무 센 것 같아 몇 번 찾아보기만 하고 말았다. 어젯밤에도 슬쩍 검색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모저모로 자리만 차지하게 될까 봐 사지 않았다. 일단 식탁 의자로 실험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나물을 씻을 때 우주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신나서 따라왔다. 의자를 가져와서 올라오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은 나한테 하라고 시킬 때가 많더니 어찌나 신이 났는지 본인이 영차영차 의자를 끌고 싱크대 앞으로 왔다. 넘어지지 않도록 등받이를 싱크대에 밀착시킨 후에 올라오도록 했다. 콩나물을 씻는 일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칭얼대지 않고 놀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콩나물 국도 끓이고 돈가스도 튀기고 소고기 조림도 데워서 오랜만에 식판식을 먹였다.


이 기세를 몰아 스스로 밥을 먹게 했다. 콩나물 국으로 샤워하고 먹고 싶은 것만 입에 와구와구 넣었지만 수저랑 포크도 열심히 사용해보고 식사에 진심이었으니 꽤 성공적이었다. 식탁과 의자와 바닥은 닦으면 되니까. 하하. 서방구가 늦게 퇴근하는 것 같아서 설거지도 함께 도전했다. 세제로 닦아 둔 그릇을 만져보고 헹궈보게 두었다. 물론 우주에게는 설거지가 아니라 물놀이였고 싱크대 아래 바닥은 물바다가 되었다. 별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신났는지 설거지가 끝나서 내려가야 한다고 하니까 아쉬워 울었다. 내일도 하자고 달랬다. 이제 매일매일 같이 하자고 했다.


저녁이 되면 오늘은 언제 잘 수 있으려나 각 재느라 기운이 다 빠지곤 했었다. 오늘은 비어있는 싱크대처럼 내 마음도 후련했다. 할 일을 모두 끝냈으니 우주와 가벼운 마음으로 밤 산책에 나섰다. 우주는 건너편 아파트의 꼭대기에 달린 커다란 M자 간판에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한다. 일몰 즈음 나가서 올리브영에 들렀다가 돌아오며 불 들어온 M을 한참 구경했다. 우주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해했다. 눈이 반짝 거리는 우주를 보고 있자면 나도 너무 행복하다. 설거지가 없으니 우주의 행복 표정을 마음껏 누렸다. 아파트 앞의 계단도 열심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집에 돌아왔다. 


귀가가 늦은 서방구에게도 편안히 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우주를 재우다 깜빡 잠들었다가, 조금 남은 설거지를 서방구가 하는 동안 또 한 번 깜빡 잠들었다. 여름이니까 매일 씻지 않으면 너무 찝찝해서 용케 몸을 일으켜 샤워하는 데 성공했다. 너무너무 개운하다. 긴장하지 않는 밤이다. 내일의 식사는 내일의 우주와 내가 힘을 합쳐 준비하면 되니까! 그리고 엄마가 온다. 즐겁게 보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22년 7월 10일 최대한 볕을 피하는 일정으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