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월 4일
정신도 육체도 한계에 도달했다. 힘에 부쳐 이제 더는 못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는 아직 한참 여유로운 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 진짜 한계에 이르니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이 그랬다. 매일 밤 우주 곁에서 기절하고 다시 눈을 뜨면 우주랑 지지고 볶는 일상. 설거지 한 번이라도 거들어 줄 서방구가 출장 가고 없으니 체력도 바닥이 났다. 우주 생일도 있었는데. 일기도 한 편 남기지 못했다.
생각하니 피곤이 배가 되어 생각을 접어가기 시작했다. 멍한 상태로 만들어놓으니 차라리 몸을 굴리기는 편했다. 무릎이 아프고 다리가 퉁퉁 붓고 목이 빳빳해질 때마다 왜 이러는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생각하기를 그쳤다. 그렇게 방치된 몸은 명절 내내 상태가 악화됐다. 다리는 코끼리 같이 더 빵빵해지고 간혹 흘리던 코피는 한 번 터지면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댁과 친정에 지내던 나흘 밤, 유일하게 했던 생각은 '도피할 수 있나?'였다.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을 발견하자 가장 먼저 일기가 떠올랐다. 쓸 말이 생겼구나. 나는 지금 정말 도망가고 싶다. 지난 수요일,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출장 일정을 읊어주던 서방구의 말이 돌덩이처럼 가슴에 내려앉아 피로를 풀 겨를도 없이 다시 채찍질이 시작됐다. 내일 집으로 올라갈 텐데, 도착하면 곧바로 엉덩이 붙이지 못하는 일상이 시작된다. 그리고 서방구는 또 출장길에 오른다. 그다음 주에도 또.
출장 일정을 듣자마자 숨이 막힌다고 했다. 서방구는 본인도 숨이 막힌다고 답했다. 4일 일정을 3일로 조정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의미 없다고 말했다. 간다는 것 자체가 힘든 거지 하루 덜 간다고 힘든 게 안 힘들어지지는 않는다고. 더 속상했던 건 자기 탓이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위로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더 속이 갑갑해졌다. 이럴 때마다 본인도 마찬가지로 힘들다며, 내가 감정을 쏟아내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선다. 그러면 나는 갈 곳을 잃는다. 타인에게 남편 욕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속되면 가족은 속상해하고 지인들은 지치기 마련이다.
그 이후로 줄곧 서방구에게 줄 마음이 점점 바닥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같이 있지도 않을 테니 딱히 좋아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그런대로 두고 있다. 지금 더 중요한 건 내가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우주를 성실하게 돌보는 일이다. 우주가 아프지 않도록 잘 먹이고 잘 재우는 일. 같이 손 잡고 고민해주는 이가 없어서 외롭더라도. 외로움이 우주를 삼키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지.
쏟아내니 좀 낫다. 힘내자. 모든 게 온전치 못하더라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