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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Oct 06. 2022

22년 10월 5일 넓고 높은 가을 하늘

24개월 28일

엄마 집이다. 우리 가족은 떠돌이 인가? 집이 있지만 집에 있지 않다. 우주는 코가 잔뜩 막힌 채로 잠을 이어가고 있고 나는 또 새벽에 눈이 떠져서 두 시간째 다시 잠에 들지 못하고 브런치의 글을 잔뜩 읽었다. 임신이 의심스러워서 '얼리 체크'나 '극초기 증상' 따위를 검색하다가 바쁘게 스크롤을 내리는 손과 눈이 갑자기 부끄러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생리가 시작되면 헛웃음이 나고 끝날 일이다. 둘째는 엄두도 안 나는 게 현실인데 또 생기려나 싶으면 기다려지기도 한다. 생각과 마음이 따로 논다.


오늘은 어머님을 모시고 백화점에 다녀왔다. 지난달에 어떤 구두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오셨다.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모르니 대신 찾아서 구매해달라는 말씀과 함께. 나는 나름 검색에 일가견이 있어, 어색한 광고 문구가 함께 달린 구두 사진 한 장으로 구매 링크를 찾아냈다. 중국인이 상품 판매를 위한 한국어를 대충 넣어 편집한 듯 보였다. 찾다 보니 여러 플랫폼에 등록된 상품이었고, 후기는 가관이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후기는 처음 신은 날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 일회용으로 만든 거냐는 문장에서 웃음이 났다.


주문하고 어머님께 돈을 받는 것도 웃겨서 그냥 사드리겠다고 했었는데 저런 신발은 사드리기도 민망했다. 한 켤레에 2만 원이 안 됐다. 다른 구두를 찾아보다가 아무래도 신어보고 사야 탈이 없을 것 같아서 백화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아버님이 워낙 물건에 돈 쓰는 걸 싫어하셔서 이번에도 나가자고 하면 아버님 편에서 잔소리가 들어올까 겁이 났지만 오늘은 아버님도 별말씀 없으시고 다행히 어머님도 그냥 안 나가고 싶다며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시댁에서 점심을 먹고 우주랑 셋이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머님은 옷이나 신발에 자신만의 스타일이 확고하신 분이다. 선물해드리기는 까다롭지만 같이 나가서 고르니 일단 눈에 들어오는 제품이 몇 가지 없기도 하고 신어보고 편안하니 바로 결정해주셔서 편했다. 그래도 여러 매장을 돌며 골라보는 데 시간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끝나버려서 이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머님은 살 건 없지만 옷 구경이나 하자고 하셨다.


매장을 둘러보며 요즘은 니트가 많이 나오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니트를 골라보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사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었나 싶다. 그냥 한 바퀴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가려던 길에 어머님의 니트 취향을 여쭈었더니 그제야 저런 게 맘에 든다며 다시 돌아가서 보여주셨다. 결국 어머님 맘에 아주 쏙 드는 옷이 없어서 사지는 못했지만. 진즉에 알았다면 미리 니트를 공략했을 텐데 역시 나는 말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돌려 말하고 숨겨 말하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못 알아듣는 내가 영 답답하시겠지만 여적지 단번에 알아들은 적이 없다. 집에 와서 곱씹은 다음에야 깨닫는 정도...?


유모차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화장품 매장이 있었다. 기초 화장품을 샘플로 쓰신다고 한 게 생각나서 화장품 있냐 물으니 없다고 하셨다. 신발도 생각한 것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샀고 니트도 못 샀으니 크림 하나 사드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본 크림은 50미리에 30만 원이라고 했는데 차마 사시라고 말이 안 나왔다. 어머님이 놀라며 내 팔을 잡고 매장을 떠나지 않았으면 거기에 서서 진땀 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어머님, 아버님께 선물할 때 고민 안 하고 제일 좋은 걸로 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크림이 30만 원인 건 비합리적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지 않고 그냥 좋은 거니까 하나 해도 된다고 큰 소리 칠 수 있으면 좋겠다.


다 서방구가 벌어온 돈이지만 생색은 내가 열심히 내면서 어머님을 집에 모셔다 드렸다. 이번 대전 일정에 시댁 1박은 없다. 좀 서운하긴 하시겠지만 너무 짧고 빠듯하고 내가 몸이 피곤하다. 거기서 안 자도 된다고 생각하니 밥도 술술 넘어가고 종일 잠도 솔솔 온다. 우주랑 동생 빵집에 가서 동생이 일하는 동안 둘이 놀았다. 오늘은 동생이 혼인신고하고 온 날이라 저녁으로 짜장면 파티를 열었다. 우주가 아주 신이 났다. 평소에는 잘 씹어 넘기지 못하던 탕수육도 어찌나 잘 먹던지. 신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저녁 내내 기를 쓰고 잠을 피해 열심히 몸을 굴리는 듯했다.


피곤했던 동생이 먼저 잠들고, 엄마도 눕자마자 코를 골았다. 놀 사람이 없어지자 우주는 아빠에게 달려가 게임 몇 번 하다가 이제 자야 해서 그만하고 가라는 말에 아쉬움 가득 안고 내 옆으로 왔다. 우유 한 잔 때리고 잠이 들었다. 귀여운 내 새끼. 공기가 제법 차가워져서 아까 깨자마자 긴 팔과 긴 바지를 입혔다. 가을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계절이 또다시 돌아왔다. 뭐든지 하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 같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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