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문 Oct 15. 2022

22년 10월 14일 마음을 녹이는 가을바람

25개월 7일

말이 터진 후로 짜증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웃음만 주던 우주가 돌변했다. 지난주부터 컵이나 국그릇을 일부러 엎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긴 했는데 그냥 재밌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것이 미운 두 돌의 서막일 줄은 몰랐다.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 더 격렬하게 하려고 한다. 세상만사 다 자기가 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 시켜줄 순 없으니 통제하려고 하면 거기에 맞서 나랑 싸운다.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다. 어디서든 뛰고 싶어 하고 걸어도 되는데 무조건 달린다. 밤이 되면 혹시나 아래층에서 전화가 오진 않을까 싶어 나만 긴장한다.


왜 늘 엄마가 화를 내면 상황이 종료되는지 알 것도 같다. 오은영 박사님이 하라는 대로 끝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한두 번이나 할만하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일어나는 저지레에도 엄마가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고 같은 어조를 유지하며 말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어려웠던 시기는 꼭 끝이 있었다. 부모가 되어 배운 게 있다면 다 지나간다는 진리 한 가지다. 이 시간도 지나갈 거다. 우주가 왜 저러는지 생각하는 건 시간낭비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시기를 슬기롭게 보낼지 생각하는 게 낫다.


우주를 재우고 서방구와 치킨을 먹으며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는 내지 말자. 화가 날 때까지 우주의 저지레가 이어지면 우주를 들어 올려 자리를 옮기자. 멀찌감치 서서 하지 말라고 말만 하지 않고 가까이 가서 물건을 놓게 하거나 손을 잡고 이야기하자. 일단은 여기까지.


출장 중에 서방구의 전화 한 통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게 너무 서운하고 속상해서 어제 전화로 한 마디 하고서는 오늘 만날 때까지 연락을 모조리 씹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혼자서 애 보는 게 힘든 일이라고 언제까지 얘기해줘야 날 좀 돌아봐줄까 억울함이 차오르다 못해 터져 있었다. 그가 출장지에서 얼마나 힘든지 이제는 관심이 없다.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줄 사랑은 점점 줄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곁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한다는 걸 연애할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결혼하기로 한 나 자신까지 원망스러웠다. 출장은 자기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니까 내가 견디는 어려움은 자기 몫이 아니라고 계속 뒷걸음질 치는 그가 미웠다. 요즘은 브런치 알고리즘이 이혼 이야기를 많이 추천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이혼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이혼하면 나는 그야말로 망한 인생이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일하러 간다 해도 경력이 없고 나이도 많아 알바 정도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집도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쪽에서 이혼을 원하는 건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덮고 괜찮은 척 살면 살았지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돈은 이런 식으로도 권력이 된다. 아무도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나를 비참하게 내몰기 쉽다. 엄마가 왜 늘 서러워했는지 이제 좀 알 것도 같다. 우주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 꼭 돈 벌러 나가야지.


그리고 우주가 그런 그늘은 몰랐으면 좋겠다. 부모가 그늘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삶이란 충분히 그늘 투성이다. 나에게는 이제 우주를 낳은 책임을 내 감정보다 앞세울 의무가 있다. 이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주 앞에서 우리 둘 사이에 냉기가 흐르거나 싸움이 나서는 절대 안 된다. 우주에게 쉴 만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제공해야 한다.


사랑이란 뭘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세상 모든 부부에게 3-40 대란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가 아닐까. 사느라고, 살리느라고 분투하며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하는 시기. 그래서 서로에게 줄 마음을 만들어 낼 에너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샤워하면서 생각이 우주에게 닿자 마음이 모두 가라앉았다. 감정이고 뭐고, 잘 살자. 그것도 지금 내가 꼭 해내야 할 일이다. 서운함 잠시 접어서 꾸겨서 버리고.

매거진의 이전글 22년 10월 12일 볕에 눈이 따가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