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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Oct 19. 2022

22년 10월 18일 춥다

25개월 11일

서방구가 불꽃놀이 봉사로 얻은 휴가를 월요일에 내서 주말에 이어 월요일까지 대전에서 보내고 오늘 아침 그는 창원으로, 나와 우주는 집으로 왔다. 서방구가 출장길에 오르면 선택지는 두 가지다. 대전에 가거나 집에 있거나. 대전에 가면 몸이 힘들고 집에 오면 마음이 외롭다. 나랑 같이 있어주는 우주가 들으면 서운할 얘기라 우주에게는 비밀이다.


우주는 스펀지처럼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한 다음 말과 행동으로 내보낸다. 대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그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 요즘은 냄새에 대해 많이 표현한다. 원래 예민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못한 건지 아니면 이제 예민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불쾌한 냄새가 나면 못 견디게 싫어한다. 무슨 냄새냐 물으며 코를 틀어막거나 자리를 이탈한다. 어머님 댁에서는 장아찌가 있는 반찬통을 열자마자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의자에서 내려가며 통을 닫아달라고 연신 외쳐댔다.


어제는 동생의 신혼집에 모여 반나절 이케아 가구를 조립했는데 그걸 내내 지켜본 우주는 돌아와서 블록을 가지고 가구 조립 흉내를 냈다. 장난감 드릴을 가지고 잉-잉- 소리 내며 여기저기 대고 돌려본다. 너무 웃기고도 신기해서 오랜만에 긴 영상을 남겼다. 장난감 선반에서 한동안 보지 못한 퍼즐을 발견한 우주는 가이드가 되어주는 밑판도 없이 자기 생각대로 이리저리 맞춰보았다. 꽤 잘 맞췄다. 간단한 것은 혼자 완성해서 밑판 위에 얹어줬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성취감이 우주의 온몸을 휘감은 듯했다.


서방구와 나는 대전 일정 내내 냉전이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 생긴 냉전이니 내 탓이 맞다. 우주의 저지레와 고집과 짜증을 받아내는 일도 충분히 힘든데 서방구까지 제 몫을 하지 않고 하나하나 내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지시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버거워서 되려 우주에게 몇 번 화냈다. 화를 삭이고 생각해보면 돋군 것은 늘 서방구다.


쌓인 화가 결국에 터진 건 시댁에서의 이튿 날 저녁이었다. 우주를 같이 씻기자 했더니 그 김에 자기도 씻으려고 들어와서는 내가 얼른 우주를 씻겨 내보내려고 하니까 괜히 다 벗고 들어왔다며 궁시렁 댔다. 이제는 화장실에도 찬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계절이다. 우주가 젖은 채로 오래 방치되면 안 된다는 건 엄마인 나만 신경 쓰이는 일인가? 아무리 씻을 마음으로 들어왔어도 우주랑 다시 나가는 일이 그렇게 큰일인가? 같이 들어와서 우주 샤워에 준 도움은 하나도 없었다. 우주 몸이 다 젖은 상태로 우리 씻는 것까지 기다리게 할 수 없었고 궁시렁 대는 꼴이 아주 보기 싫어서 그냥 내가 우주를 데리고 나갔다. 문을 쾅 닫으니 왜 자기한테 화를 내냐는 말이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그 뒤로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닫았다. 대전에서는 우리 둘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크게 티 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내내 생각했다. 이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깔끔할까. 감정을 단 한 톨도 남기지 않으면서 내가 상처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법을 계속해서 찾아냈다.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육아를 비롯한 삶 전반에서 느끼는 피로와 고충을 서방구에게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돌아오는 답은 위로가 아니라 자기도 힘들다는 말이니. 그럼 얘기할 곳이 없어지는데 괜찮은가 물었다. 반려자에게 힘들다는 말도 못 하는 인생이 될 텐데 그것도 괜찮은지 물었다. 쉽게 답을 찾지 못하다가 7년 만에 우리가 오랜 시간 따르는 목사님 댁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드디어 찾아냈다.


완벽한 위로는 어차피 사람에게 얻을 수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은 더 나아질 것 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진짜 위로는 예수님만 주실 수 있다. 인생의 성패는 고통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고통을 좀 더 건강하게 버티는 몸과 마음에 달려있다. 주어진 상황을 서방구가 아니라 예수님과 풀어나갔어야 했다.


집안일과 육아는 부부의 일인데 90퍼센트가 내 몫인 게 늘 억울했다. 서방구의 외벌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많이 기울어있다고 느꼈다. 그 억울함이 ‘전화 한 통 없는 남편’에 꽂혔던 것 같다. 내 마음이 건강하면 그깟 전화 한 통 기다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 정도도 못할 만큼 힘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은 했지만 아직 그의 고충은 내 안중에 없다.)


억울하면 기도하기로 했다.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좀 더 참아보기로 했다. 몸의 피로든 상황이든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든. 마구잡이로 어딘가에 쏟아내기보다 견디는 것이 내게 유익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 근 몇 달간 먹지 않았던 영양제도 챙겨 먹고, 기도도 매일 꼭 하고, 일기도 되도록 놓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느라 우주의 웃음과 목소리를 놓치지 말고 순간을 누리면서 살자고 했다. 조금 늦게 먹어도, 늦게 씻어도 괜찮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5주년 기념으로 맞추기로 했던 커플링도 고르고, 목사님 댁에서 오랜만에 오랜 시간 떠들어보고, 동생네서 가구 조립을 마치고 엄마 아빠까지 모여 중식으로 거하게 가족 식사도 했다. 부부로 시간이 쌓이니 냉전 중에도 할 건 다 하는 내공이 생겼다. 신혼 초에는 감정에 휩쓸려 꼴도 보기 싫어서 할 일도 내팽개칠 때가 있었는데. 나아진 건가? 아무튼 시간이 준 변화다.


대전에서 집에 돌아와 잠든 우주를 뉘어 놓고 쉬는 사이에 사촌동생이 놀러 왔다. 짧은 수다를 떨다가 잠에서 깬 우주와 백화점 나들이에 나섰다. 좋아하는 편집샵들을 소개해주고 나보다 더 재밌게 구경하는 동생을 보며 행복했다.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사이는 나에게 커다란 행복이다. 아쉽지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태워다 준다고 했더니 바람 쐬기 좋은 계절이라며 동생은 버스로 가겠다고 해서 역에 내려줬다. 언젠가 나도 누렸을 동생의 자유를 떠올려봤다. 우주와 분리되는 시간이 생기면 나도 다시 버스 여행길에 올라봐야지.


식단을 짜고 잠깐 다시 눈을 붙여야겠다. 내일은 이케아에 가서 판초 형태의 수건을 몇 개 더 사 와야겠다. 얼마 전에 시험삼아 한 개만 사왔는데 날이 추워져서 아주 유용한 육아 템이 되었다.


참기로 결심했더니 이상하게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졌다. 아마도 아까 우주가 퍼즐을 맞추고 난 후에 느꼈을 성취감이랑 비슷한 감정일 것 같다. 나도 또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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