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문 Nov 06. 2022

22년 11월 5일 춥다가 덥다가

25개월 29일

아버님 생신과 할머니 생신과 우리 결혼기념일을 챙기러 대전에 왔다. 금요일에는 시댁에서 하룻 밤 자고 토요일에는 식당에서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났다. 다른 식구들은 한 번씩 따로 만난적이 있었는데 큰 엄마, 큰 아빠는 코로나 시국이 된 후에 처음 뵈었다. 점심 식사 잠깐 하고 헤어졌지만 가족으로 부터 받은 사랑이 지친 마음을 충분히 충전해주었다.


가족 모임은 1년에 4번이다. 명절과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으로 모인다. 할머니 생신으로 모이자고 큰집에서 정해주신 오늘은 내 동생 결혼이 2주 남은 시점이다. 모임 날짜가 정해지고는 우리 가족은 미안함에 몸둘 바를 몰랐다. 대전에 사는 식구는 할머니, 할아버지 뿐이라 모두 2-3시간이 걸리는 여정을 2주만에 또 해야하기 때문이다. 파주 사는 작은 집은 보통 5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우리는 괜히 꼭 모여야한다는 강박에 다른 식구들은 생각도 않고 무리해서 날짜를 잡은 큰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일기 쓰다 생각나서 아까 모임 때 찍어둔 영상을 다시 봤다. 다들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수도 없이 받으셨을 케이크를 처음 받는 듯 정성스럽게 커팅하고 계셨다. 가족들이 오느라 수고하는 것만 생각하고 우릴 보는 게 유일한 생의 낙이 된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제 연세가 많아 결혼식에는 힘들어서 못 오겠다고 하신 것도 아는데. 큰 아빠는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을 가장 크게 생각하신 것 같다.


낮잠을 또 패스하려는 우주를 한참 지켜보다 아빠 손에 맡겨두고 우리는 벌써 5주년이 된 결혼기념일을 챙기러 나왔다. 지난 번에 맡겨둔 반지부터 찾았다. 결혼할 때 맞춘 커플링은 잘 안끼게 되서 5년간 우리 손가락은 비어있었다. 이제는 좀 반지도 끼우고 살아보자 싶어서 5주년 기념으로 맞췄다. 예뻤다. 살쪄서 거의 모든 반지가 놀고 있는 상황인데 드디어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갖게 됐다. 서방구는 걷다가 한 번씩 손을 펴서 반지를 구경했다. 이번에는 우리, 잘 끼고 다닐 수 있을까?


예약해둔 호텔에 체크인 먼저 하고 입실했다. 일단 침대에 드러누웠다. 서로 나가자는 말만 할 뿐 몸을 일으키는 자는 없었다. 얼마만에 누리는 고요함인가. 종알거리는 우주가 없다니. 다 떨어진 체력을 조금이라도 챙기려고 계속 누워있었다. 그리고 쇼핑하러 나갔다. 엄마, 아빠가 두둑히 챙겨준 축하금과 여기저기서 받아 모은 상품권을 가지고 계속 눈독 들이던 청바지 하나랑 모자 하나를 데려왔다. 모자 산다고 기웃거리면 눈치주는 서방구 때문에 그간 절제했는데 오늘은 그냥 그러던지 말던지 샀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상상했던 여유로운 쇼핑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가자고 보채지 않으니 좋았다. 조개구이 집에 웨이팅 걸고 그 사이에 올리브영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다. 피부 관리를 전혀 안 했더니 얼굴이 날이 갈 수록 쳐지는게 맘에 걸려서 탄력 크림을 사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카트를 밀겠다며 난동 부리는 우주 덕분에 대충 보고 얼른 집어 쇼핑을 마쳐야 했겠지만 오늘은 찬찬히 둘러보고 샘플도 발라보고 신중하게 골랐다.


조개구이 집에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다. 혹시 누가 먼저 앉을까봐 얼른 뛰어갔다. 얼마만에 먹는 조개인가. 그것도 구이라니. 서방구가 착착 구워 착착 잘라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었다. 양이 적은 것 같았는데 다 먹고 나니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행복했다. 당분간 조개 구이를 먹으러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 부드럽게 입에서 녹던 가리비가 생각난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따뜻한 물에 씻고 대충 웃긴 채널을 찾아 틀고 과자도 먹고 맥주도 먹고. 언젠가는 그게 간절히 원하는 행복이 될 줄 모르고 누렸던 소소한 일들을 했다. 그리고 잠시 일상을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바라보았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지나온 몇 달의 시간이 무색해졌다. 우주에게 더 다정하지 못했던 내 모습도 떠올랐다. 푹 쉬고 돌아가 우주를 더 많이 안아줘야겠다. 다행히 일찍 잠들었다고 연락이 왔다. 귀여운 짜식. 내일 만나자.



매거진의 이전글 22년 10월 28일 미세먼지 머선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