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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Nov 16. 2022

22년 11월 15일 추워졌다

26개월 8일

오랜만에 블로그에 먼저 일기를 쓴다. 그간에는 브런치에 남기고 블로그에 옮기다가 문단 단위로만 복사되는 게 너무 귀찮아서 언젠가부터 블로그에 옮기기를 멈췄다. 브런치 UI가 예쁘기도 하고 맞춤법 검사도 되니까 거기에 먼저 썼는데 이제 그런 것도 다 쓸모없는 것 같다. 지워지지 않는 차이점이 있다면 플랫폼마다 독자의 성향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왠지 브런치는 일기라도 글을 잘 써야 할 것만 같고 블로그에는 그냥 넋두리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브런치는 누구라도 읽어주실 것 같은데 블로그는 일단 글이 길면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쓸모없는 말이 길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피곤하다. 등은 딱딱하게 굳고 목은 뻣뻣하게 섰다. 덕분에 두통도 있다. 지난주 엄마 집에서 풀고 온 피로가 무색하게 단 3일 만에 원복 되었다. 엊그제 서방구가 줄자에 손을 크게 베이는 바람에 퇴근하고 돌아와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열시까지 서있었다. 선 김에 내일 아침까지 만들어뒀다. 아침 고민은 안 해도 되겠다. 후아. 지금이라도 일기 쓰기를 당장 그만두고 눈 감고 싶지만. 기록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조금만 힘 내보자.


주말에는 곧 입주하게 될 아파트 사전점검 행사에 다녀왔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금리가 목을 조여오지만 그래도 우리의 첫 집이 될 공간을 만날 생각에 설레었다. 숨은 하자들을 찾아내야 하는 날이라 아빠랑 엄마도 모시고 갔다. 아빠는 건축사다. 우리는 아빠 덕에 전문가를 모시고 간 셈이 되었다. 이제 이사 갈 집이라고 하니 우주도 들뜬 모양이었다. 다들 이리저리 집을 돌아다니며 관찰하니까 본인도 따라서 집안을 쏘다녔다.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많이 칭얼대지 않고 잘 있어주었다.


지금 사는 곳은 기본이 30층 되는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있어서 가끔은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이사 가는 곳은 고도제한이 있어서 높아야 15층 정도라 널찍한 단지를 거닐어보니 하늘도 잘 보이고 처음 오는 곳인 데도 정겨운 느낌마저 들었다. 새 집은 3층이다. 제일 끝 동이라 거실 창에 서보니 걸리는 것 없이 시야가 넓게 트였다. 그래서 집도 밝다고 엄마 아빠가 너무 맘에 들어 하셨다. 지금 집 보다 작은방도 더 크고 주방도 넓었다. 이래저래 다 맘에 들어서 다행이었다.


그날 대출 상담 창구도 열려있어서 서방구가 상담도 받고 왔다. 상담 내용과 대출 신청 내용을 토대로 계산해 보니 원리금을 대략 170만 원 정도 매달 내며 살아야 할 것 같다. 둘째를 언제 가져서 낳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이 우리에게 사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째가 아니라 내년에는 나도 나가서 일을 해야만 한다. 내가 계속 그렇게 말했었는데. 서방구는 내내 괜찮다더니 실제로 계산이 나오니까 일 안 해도 괜찮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요새는 그래서 우주를 보면 애틋한 마음도 든다. 우주가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녀일 수도 있으니.


그러든지 말든지 우주는 아주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겁도 많고 예민해서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내 껌딱지로 변하던 우주가 이제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아울렛에 가면 엄청 커다란 그물 놀이터가 있는데 늘 내가 같이 올라가서 놀아줬었다. 최근에 보수공사가 있어서 한동안 놀지 못했는데 주말에 가보니 다시 열려있었다. 우주는 반가워서 얼른 올라갔고 나도 뒤따라 올라갔는데 안전 요원이 어른은 내려와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우주에게 엄마는 여기서 놀 수 없으니 같이 내려가자고 했는데 우주는 혼자 놀겠다고 했다. 그물 구조물이라 서서 걷기도 힘든 곳을 열심히 기어서 이동하며 무서울 만한 구조물에도 들어가 보고 나와보고 신나게 놀았다. 우주보다 훨씬 큰 아이들이 거침없이 돌아다녀서 그물 아래에 엉거주춤 서서 우주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울렁울렁 거렸다. 우주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미로 같은 곳에서 빠져나오면 또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만족할 만큼 놀고 나서야 이제 간다고 했다.


아울렛에 갔으면 회전목마를 타야지 완성이다. 놀이터에서 한바탕하고 아울렛 마지막 코스로 회전목마에 올랐다. 늘 하던 대로 우주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옆에 섰는데, 이번에도 역시 어른은 이제 내려야 한다고 제지 당했다. 8일부터 생긴 규칙이란다. 우주에게 혼자 타야 한다고 일러주고 혹시나 싫다고 울면 얼른 표를 더 끊어서 나도 말위에 올라탈 작정이었는데, 우주는 그런가 보다 하며 나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혼자 용감하게 회전목마를 타고 왔다. 우리는 감격했다. 서방구는 이제 어린이집에 갈 준비가 끝났다고 말했다.


예민한 우주는 당연히 머리 깎는 것도 싫어한다.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로션 바른다고 손이 얼굴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으니 자기 머리 가까이에 사각거리는 가위나 윙윙 소리 나는 바리깡이 오는 건 더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힘과 지능이 업그레이드되면서 미용실에 가는 것 자체가 민폐가 되어 집에서 해결해 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가만히 있질 않으니 이상하게 잘린 채로 살았다. 이번 주 토요일이 동생 결혼식인데 머리가 귀도 덮고 눈도 찌르는 상태로 그냥 갈 순 없지 않은가.


우주가 울고 난동 부리든 말든 마이웨이로 머리를 잘라주시던 원장님은 이번 주 내내 휴가인 것 같았고, 다른 미용실에 알아보니 심하게 울면 자르다 중단할 거라고 했다. 방법은 또 하나만 남았다. 집에서 해결하기. 서방구는 퇴근해서 내내 우주에게 머리 깎는 것이 왜 무섭지 않은 일인지 설명했고, 바리깡을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우주는 고민하다가 바리깡을 쓰지 않고 가위로만 잘라준다면 해보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크게 믿진 않았다. 그러다 또 자지러지게 울겠거니, 일단 하겠다고 한 것에 감사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주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겁먹어서 고개를 자꾸 숙이려고 하긴 했지만 괜찮다고 안심 시키면 그래도 해보려고 버텼다. 세상에나. 우주 머리가 덕분에 미용실에 다녀온 것처럼 예쁘게 완성되었다! 그대로 결혼식에 가도 될 만큼!


우주는 독립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요즘 부쩍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들까지 내 손이 닿으려고 할 때마다 ‘우주가!’ 하고 말한다. 계단도 일단 내 손을 잡지 않고 올라가 보려고 한다. 카시트에서 내릴 때도 혼자 내려보겠다고 한다. 그건 아직 불가능한 일이지만. 양말도 신발도 옷도 다 자기가 벗겠다고 말한다. 뭔가 잘 안되면 금방 손에서 놓아버리던 아이라서 이렇게 다 자기가 하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유난히 겁이 많아서 내 손을 놓는 데 한참 걸릴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감격했다. 우주에게 너무 고마웠다. 우주 진짜 멋진 아이구나.


밀린 시간을 한 번에 담으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앞으로는 짧아도 매일 담도록 해보자. 에구. 너무 졸리다. 감격은 내일 또 하고 일단 자야겠다. 수고했다 오늘도. 내일은 우주의 콧물이 좀 그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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