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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Nov 27. 2022

22년 11월 26일 찬 바람 실컷 맞은 날

26개월 19일

9시경, 우주 재우다 같이 잠들었는데 종일 양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무의식을 지배해서 몇 번이고 벌떡벌떡 일어나다가 드디어 다시 눕지 않고 양치하러 다녀왔다. 양치하면서 지금 몇 시일까 대충 때려 맞춰봤다. 체감 4시였는데 저녁 먹은 그릇을 물에 담그지 못한 것도 생각나서 처리하고 돌아오니 자정이 조금 넘어있었다. 에잉? 이렇게 잠깐 잤다고?


잠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더니 드라마를 볼까 하다가 또 며칠 쓰지 않은 일기가 떠올라 브런치를 열었는데 왜 자꾸 눈이 감긴단 말인가. 어쩌면 어렵지 않게 다시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는 한 번 켜면 다음이 궁금해서라도 잠이 깨 버린다. 그렇게 또 푹 자지 않으면 엄청난 피로가 나를 기다리겠지. 제발 일기를 발행하기 전에, 드라마를 켜고 싶기 전에, 확실한 잠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교회 수련회에 다녀왔다. 특정 부서에서 하는 수련회가 아니라 나보다 위, 아래 또래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가정이 참여하는 수련회였다. 내가 좋아하는 언니 네도 애 둘과 함께 참가한다고 해서 나도 2주 전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서방구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원래 어릴 때부터 그런 단체 활동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제 가지 않을 자유가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나는 가고 싶어서 우주와 다녀오겠다고 했다. 다행히 알고 보니 아빠가 담당 장로였고 엄마도 함께 해주어서 엄청 큰 힘이 되었다.


서방구와 반대로 나는 어릴 때부터 수련회를 참 좋아했다. 장이 심리상태를 많이 반영하는 편이라 1박이면 1박, 2박이면 2박 큰 일을 보지 못해 배가 빵빵해짐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처음에는 화장실을 가보려고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복부의 불편감을 견디는 데 몰두했다. 어차피 집에 도착하면 모든 게 해결되니 말이다. 수련회 가기 전 날 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기는 설렘, 출발하려 아침에 교회에 모여 떠드는 순간,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이 있고 겨울이면 따뜻한 온돌이 있는 강당의 느낌, 친한 친구들과 밤새 떠들다 눕는 숱한 밤들이 모두 좋았다.


코로나와 임신과 출산을 지나며 우주가 2년을 채우고도 2달을 더 살 때까지 수련회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타지로 떠나는 바람에 더 그랬다. 공동체가 너무 그리웠던 와중에 생긴 기회이니, 어찌 지나갈 수 있겠나. 이미 가기로 결정한 뒤에 어머님이 그 날짜에 김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수련회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머님도 그러라고 하셨다. 김장에는 서방구가 투입하기로 했다.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날 일정을 보니 아무래도 저녁 늦게나 도착할 것 같았다. 한참 고민하며 귀찮음과 싸우다가 수련회 출발 전 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가기 전에 집에 들르겠다고. 엄마 집에서 아침 먹고 어머님 댁으로 가겠다고. 우주를 또 잠깐 보시면 서운해하실 것 같아서 그랬다. 집에 도착해보니 김장 속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저녁에나 도착한다던 절인 배추도 와 있었다. 점심 먹고 쉬다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틀렸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장갑을 장착하고 김장에 임했다.


두 박스라 금방 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김장이 재밌기도 했다. 몇 해 동안 다른 권사님과 김치를 담그셔서 같이 못 했는데, 언젠가는 다시 김장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수육도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수련회로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님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아니라 아들이 왔으면 절대 김장시키지 않았을 거라는 말. 어차피 아들이 왔어도 방에 들어가 자라고 했을 거라는 말. 힘들게 일하고 온 애한테 어떻게 집안일까지 신경 쓰게 하겠냐는 말. 그 말들이 나를 또 객식구로 만들었다. 만날 딸 같다는 둥 딸이라는 둥 하면서 꼭 이럴 때 그 말이 사실이 아닌 게 티가 난다.


찝찝함을 뒤로하고 수련회에 같이 들어가기로 한 엄마를 픽업하러 갔다. 수련회장이 위치한 예산까지 가던 고속도로 풍경이 기가 막혔다. 5시쯤이라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산 뒤로 넘어간 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 멋지다고 연신 감탄했다. 우주는 내내 버티던 낮잠을 푹 잤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내내 먹고 웃고 떠들었다. 우주 잠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수련회의 하이라이트, 저녁 집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따라 우주를 재우며 찬양하던 순간도 소중했다.


푹 잠든 우주 덕분에 자정에 펼쳐진 닭강정 파티와 친한 언니네 방에서 이어진 새벽 수다도 누렸다. 언니는 캐나다에 살다가 잠시 복직하러 한국에 들어와 있다. 그간 언니랑 따로 만나지는 못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숨기는 것 없이 대화하니 속이 시원했다. 덕분에 잠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은 해갈되었다. 버터를 듬뿍 발라 구운 베이글이 아침 식사였다. 한 시간 짜리 명랑 운동회도 열과 성을 다해 참여했다. 우주는 할아버지에게 꼭 붙어서 장 외를 돌다가 판 뒤집기 시간에 데려와서 빨간 판을 뒤집어 파란 판으로 만들어 보게 했다. 뭔지 모르고 그냥 판을 들고 행복해했다.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후에 다 같이 예당호수 관광에 나섰다. 모노레일 예약시간이 한참 남아있어서 출렁다리를 건넜다. 내내 피곤해하던 우주의 컨디션과, 결혼식 때문에 아침 먹고 떠난 언니의 남겨진 첫째를 걱정하느라 호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은 또 어찌나 세던지. 다리를 건너 돌아와서 들어간 카페에 앉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그 길에 우주는 유모차에서 폭 잠들어, 커피를 한참 마시고 모노레일 타려고 줄 섰다가 타고 돌아올 때까지 깨지 않고 잤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래서 모노레일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주가 참 좋아했을 텐데. 아쉬웠다.


시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언니 아들을 집에 데려다 주기로 되어있어서 한참 고민에 빠졌다. 데려다주고 시댁으로 가자니 우주가 그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우주가 우리 차에 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빠 차에 우주를 맡겼다. 엄마, 아빠가 시댁에 데려다 놓기로 했고, 나는 언니 집으로 향했다. 우주가 우리 차에 타지 않은 것은 정말로 신의 한 수였다. 생각보다 밀리는 구간이 많았고 많이 컸다고 생각했던 9살 형아도 챙기려면 손 가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주유하려고 들른 주유소에서 손에 하나씩 소시지를 쥐고 돌아오는 일은, 우주가 있었다면 절대 불가능이다. 또 엄마, 아빠 덕을 봤다.


녹초가 되어 시댁에 들어오니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주는 아빠 품에 누워서 내가 오든 말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들어보니 좀 전에는 엄마를 보고 싶다며 대성통곡했다고 했다. 아닌 척하는 게 너무 웃겼다. 셋이서 밥을 다 먹고 우주는 응가를 때리더니 그때부터 온갖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밀려오는 피로가 우주를 덮친 듯했다. 오열하는 우주를 붙들고 1분 만에 샤워시키고 따뜻한 우유로 달랬다.


하와이에서 돌아온 동생이 하루라도 빨리 우리에게 선물을 전달해주고 싶어 우리에게 와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피곤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우주를 또 밖에 데리고 나갈 순 없었다. 선물은 서방구가 몰래 나가서 받아오기로 했다. 우주는 계속 내 품에 안겨있다가 진정이 다 되고서야 스르르 잠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잘 자고 있다. 양치하고 서방구가 받아온 선물 꾸러미를 보니 동생이 써준 카드가 보였다. 나를 많이 사랑하고 내게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동생은 늘 감동하게 한다. 새겨둘 마음을 또 하나 얻은 것 같다. 선물은 내일 다 같이 열어봐야지.


슬프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못 본 슈룹이나 한 편 보고 자야겠다.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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