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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Nov 30. 2022

22년 11월 29일 돌풍

26개월 22일

늦잠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우주도 나도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서방구가 걱정됐다. 우리가 피곤한 만큼 똑같이 피곤할 텐데. 이른 아침 우리도 모르게 출근했을 서방구가 안쓰러웠다. 우주랑 일어나서 시리얼로 간단히 허기를 달랬다. 점심은 어제 끓인 미역국이 있으니 걱정 없었다. 이번 주까지 빵집 휴무로 정해서 쉬고 있을 동생에게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오전 내내 우주랑 셋이 논 것처럼 계속 통화했다. 우주가 이모랑 통화하는 동안 덕분에 점심으로 먹일 소고기 볶음밥도 편히 만들 수 있었다.


밥을 맛있게 듬뿍 퍼 먹으며 행복해하는 우주를 보니 이앓이가 다 지나간 듯했다. 볼살도 곧 제자리를 찾겠구나. 우주는 배 부르게 밥을 다 먹고 에디의 수학교실을 보여달라고 했다. 요즘 푹 빠져있는 영상이다. 뽀로로 친구 에디가 나와서 수 개념을 알려준다. 좋아하는 숫자들이 계속 나오니까 보다 보면 함박웃음을 짓기도 한다. 에디가 문제를 풀기 전에 꼭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어쩌다 내가 그걸 흥얼거리니까 그다음 구절을 우주가 불렀다.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기특해서 자꾸 시키고 있다. 귀엽다.


우주가 영상에 빠져있는 사이에 오랜만에 물걸레를 장착한 청소기로 집안 구석구석 청소했다. 열흘이나 집에 없었으니 먼지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뭉쳐진 먼지 뭉치가 많이 발견됐다. 창문을 열자마자 돌풍이 집안으로 들어와 환기가 제대로 됐다. 부드러워진 바닥을 맨발로 슥슥 문지르니 느낌이 좋았다. 우주 옷을 미리 입혀둔 덕에 나만 얼른 옷을 갈아입고 집 밖을 나섰다. 백화점에 걸어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서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기로 했다. 내일부터 한파가 온단다.


유모차에 앉아서 세상 구경하며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우주가 즐거워 보였다. 재밌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백화점 입구와 1층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는 우주가 가장 좋아하는 엘리베이터다. 알파벳 M 버튼이 있기 때문이다.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참 오르락내리락 놀다가 배가 고파진 우주는 그만 탄다며 3층에 가자고 했다. 3층에는 우리가 꼭 들러서 빵과 커피를 마시는 카페가 있다. 우주가 잘 먹는 애플 크럼블과 내 커피를 주문해서 잠시 앉아있었다.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있으면 우주가 언제 이렇게 컸나, 감회가 새롭다.


내일부터 진짜 겨울이 시작되는데, 우주는 겨울 신발이 없었다. 꽂힌 신발 하나만 신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새 신발 사주는 것에 매번 실패했다. 그 신발은 얇은 천으로 되어서 겨울에 신었다가는 동상에 걸릴지도 모른다. 일단 새 신발 구경 가자고 꼬드겼다. 동생 결혼식에 신었던 구두를 꽤 맘에 들어했었는데, 구두랑 비슷한 모양의 신발이 있어서 구두 신발이라며 관심을 끌었다. 그래도 신어보는 건 싫다며 울어재끼는 고비가 있었지만, 용케 신발 바닥의 숫자를 발견해서 우주가 신발을 소유하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색깔도 야무지게 골랐다. 돌아오는 길에 신고 왔다.


늦잠 때문에 낮잠을 패스했던 우주는 오는 길에 유모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더 재우고 나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러면 밤이 길어지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주를 깨웠다. 서방구가 7시에 집에 도착했고, 우주도 그때까지 배고파하지 않고 잘 놀아주어서 다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어제 사 둔 가자미를 굽고 계란 프라이도 하고 된장찌개도 끓였다. 보통 귀찮아서 그냥 우주가 먹는 간 그대로 다 같이 먹었는데, 좀 더 맛있는 식사가 하고 싶어서 우주 것을 덜어두고 우리 몫에 고추장 한 숟갈을 퍼 넣었다. 맛있는 저녁이 되었다.


서방구가 우주를 씻기고 나는 쌓인 설거지를 처리했다. 이틀 감지 못한 머리도 감았더니 속까지 시원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착착 잘 준비를 마쳤다. 출장이 없으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살만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져서 뭐든 괜찮다며 웃어넘기고 있다. 또 언제 이 평화가 깨질지 모르니 있을 때 누려야지. 날씨가 확실히 추워진 모양이다. 집 전체에 보일러가 돌고 있다. 모두 무사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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