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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Dec 04. 2022

22년 12월 3일 꽁꽁 싸맸다.

26개월 26일

우주가 잠든 후, 슈룹 15화와 새로 시작한 알쓸인잡 1화를 봤다. 보다 보니 한 시가 가까워져서 더 보다 그냥 잘까 일기를 쓸까 고민에 빠졌다. 일기 쓰려면 고요해지는데 그게 너무 싫었다. 가만 생각하니까 저녁에 우주도 다 씻겼고 집안일도 할 게 없고 서방구가 잘 놀아주고 있어서 잠시 멀뚱히 있었는데 그 시간이 못 견디게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한가할 때면 무조건 드라마나 예능을 켰는데 그때는 우주가 자고 있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초여름까지는 시간 나면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1박 2일, 기차로 우주랑 대전에 다녀왔다. 우주가 너무너무너무 좋아했다. 나도 그만큼 좋았다. 날이 엄청 춥다고 엄마가 하도 강조해서 둘 다 꽁꽁 싸맸다. 우주만큼 커다랗고 무거운 백팩을 메고 우주도 안고 다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가는 기차는 두 자리 예매에 성공해서 우주랑 한 자리씩 앉을 수 있었다. 평택지제역쯤에서 갑자기 지상으로 올라오는 구간이 있는데, 그 어떤 영상미보다 더 드라마틱한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서쪽 자리라서 블라인드를 열고 갈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드넓은 풍경을 원 없이 보았다. 우주는 좀 더 어릴 때보다 확실히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계속 출입문을 열고 싶어 했는데. 많이 컸다.


엄마가 우리를 픽업하러 나와있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출시될 동생의 케이크 사진을 찍으러 동생 집에 갔다. 마침 볕이 좋은 시간에 도착해서 후다닥 사진을 찍고 동생이 만들어준 크림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다. 동생이 전날부터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겼다고 해서 우주랑 셋이 한의원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에서 잠든 우주를 다시 집에 누이는 데 성공했다. 친한 언니와 아이들, 그리고 친한 동생도 놀러 왔다. 동원훈련에 다녀온 제부도 돌아오고 저녁 늦게 또 다른 언니와 아기까지 합류해서 명절 같은 저녁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우주와 엄마 집으로 이동했다. 우주를 기다리던 엄마 아빠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너무 들떠서 또 너무 늦게 자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예상보다는 일찍 잠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나도 곁에서 기절했다. 우주는 6시경 또 우유를 찾으며 깼고, 나는 양치 안 하고 잔 게 생각나서 얼른 일어나 양치부터 했다. 우주가 다시 잠들지 못하길래 그냥 일어나서 놀겠냐고 물으니 그러고 싶다며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다 같이 이른 아침을 먹었다. 너무 아침을 빨리 맞이한 우주는 금방 낮잠에 들었고 3시간이나 푹 잤다. 역시나 나도 곁에서 푹 잤다.


늦은 점심에 일어나 오리백숙을 먹으러 다녀왔다. 어제 점심의 파스타, 저녁의 굴보쌈과 물회, 이른 아침의 라면사리 넣은 김치찌개로 달린 내 속이 욕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또 열심히 먹었다. 집에 돌아와 실내 자전거를 조금 탔다. 양심을 조금 챙긴 기분이 들었다. 우주는 식당에서 오는 길에 할아버지 집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오자마자 할아버지 손을 잡고 떠났다. 40분 정도 놀다 들어왔다. 조잘조잘 집안 곳곳의 물건들을 가지고 놀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도착했을 때처럼 엄마가 우리를 역에 다시 데려다주었다. 역이 익숙한 듯 걷는 우주를 보니 이제 제법 같이 여행할 맛이 난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문득 내년에도 그냥 어린이집 보내지 말고 우주랑 정기적으로 여행을 떠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을 남기고 편집해서 유튜브도 올리고, 블로그에 아기와의 여행을 주제로 포스팅도 하면 꽤 괜찮은 콘텐츠가 나오지 않을까? 좀 터무니없지만 행복한 상상을 해봤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방구가 우주를 받아줄 거라 기대했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했더니 길을 못 찾았다는 황당한 변명만 할 뿐. 무려 이틀의 자유를 주었건만 시간 맞춰 나오지도 못하다니. 일찍 좀 나오지 그랬냐고 했더니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말을 그렇게 한다며 발끈하는 걸 보니 애초에 늦게 나온 것도 맞고 별일도 아니었겠다 싶었다. 예상이 맞았다. 갑자기 차키로 문이 안 잠겼다고 했다. 아니 그럼 그냥 일단 오면 될 것 아닌가. 까먹어서 안 잠그고도 잘만 돌아다니는 마당에. 아니면 제시간엔 도착 못하게 됐다고 카톡이라도 남기던지. 오자마자 백화점에서 저녁을 해결했는데, 음식값이 꽤 많이 나왔지만 잘 먹었다는 인사 한 번 하지 않는 것으로 소심하게 복수했다. 서방구는 만난 후로 내 말을 죄다 퉁퉁 튕겨내고선 우주랑 같이 일찍 잠들었다. 잘 자라.


아까 미리 시켜둔 새벽 배송 덕분에 마음이 편안하다. 맛난 아침과 함께 일요일을 열어야지. 소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월요일에 떠날 여행을 대비해서 우주 겨울 바지도 사러 가야 한다. 나도 신발이 죄다 반스라서 좀 도톰한 걸 하나 장만해야 할 것 같은데. 아까 그놈의 운동화 얘기하다가도 퉁퉁거려서 빈정상했다. 사달라는 것 같아서 그랬을 거다. 아오. 내일 또 생각나면 티 안 나게 복수해야지! 이제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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