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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문 Dec 17. 2022

22년 12월 16일 엄청 춥다고 해서

27개월 9일

땀나고 설레는 기차여행으로 대전에 내려왔다. 우주의 늦잠으로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쓰레기까지 처리한 후에 우주를 들고 눈길을 달렸다. 다행히 역까지 가는 버스가 많아서 정류장에 들어오고 있는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플랫폼에 도착하니 곧 기차가 들어왔다. 안도했다. 아까 달릴 때만 해도 기차를 못 타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겹겹이 챙겨 입은 옷부터 벗었다. 엄청 춥다고 해서 껴입고 나왔는데 우주만 한 가방과 우주를 들고 다니면 추위를 느낄 틈이 없다. 터널을 지나 지상으로 나오니 어제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얘져있었다. 나는 바깥 풍경을 보고 싶고 우주는 커튼을 올렸다 내렸다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적절히 중간쯤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우주는 과자를 달라 외쳤고, 그럴 줄 알고 간식 가방을 따로 빼둔 나를 대견해하며 과자와 주스를 줬다.


동탄-대전 간 SRT는 40분 정도 달린다. 우주랑 둘이 타기에 딱 괜찮은 거리다. 좀 더 가면 아마도 우주가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을 거다. 내리자마자 신탄진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대전에서 출발하는 열차라서 시간이 좀 남았는데도 이미 플랫폼에 서있었다. 어디에서 기다리나 고민이었는데 기차 안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기다릴 수 있었다. 객차는 3개뿐이었다. 원래 이렇게 짧았나? 무궁화호 정말 오랜만이다.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정겨웠다.


10분을 달려 도착한 신탄진 역에 서방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바로 시댁으로 향했다. 지난번 방문 때 얻은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오는 길 내내 친구와 카톡으로 깊은 빡침을 나눈 덕에 스트레스가 좀 풀려서 아무 생각 없이 시댁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두 분 다 내게 눈치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주가 과연 밥을 먹을 것인가. 그것이 내 최대 숙제였다. 시댁만 오면 가만히 있질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밥을 잘 안 먹는다. 거기에다 아버님은 우주가 왼손으로 밥을 먹으려 하면 매번 오른손을 쓰라고 가르치시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앉으라고 다그치시니 우주는 더 말을 안 듣는 아이가 되어버려서 나도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 밥은 어거지로 욱여넣고 우주 먹이기에 전념했다. 다행히 챙겨 온 소고기 볶음으로 만든 볶음밥을 생각보다 많이 먹어주었다.


오후에는 어머님이 단체전 진행하고 계신 갤러리 카페에 갔다. 우주는 가는 동안 짧은 낮잠을 청했다. 도착해서 더 재우려고 했는데 유모차에 내리다가 망했다. 그래도 딸기주스와 당근 케이크를 먹고 우주는 행복 만땅이었다. 어머님이랑 오랜만에 밖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본 것 같다. 가족이라도 집에서 나누는 대화랑 밖에서 나누는 대화는 분위기가 다르다. 주차 무료 시간이 30분이라고 하니 30분만 있자고 하셨는데 어쩌다 보니 한 시간 넘게 있다 나왔다.


백화점 주차장이라 약간의 쇼핑으로 주차비 할인을 노렸다. 따뜻한 겨울 양말을 몇 개 샀다. 작은 행복이었다. 새로 산 털신발이 좀 컸는데, 거기에 신으면 딱 좋을 것 같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2박 3일 간 우주에게 줄 먹을거리를 샀다. 어른들 식사에 필요한 것도 사야 하나 하다가 어머님이 됐다고 하셔서 그냥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뭐라도 좀 살걸 그랬나 싶다. 이럴 땐 내 동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떠올려보는데 아마도 센스 있게 재료를 충분히 사서 맛있는 음식을 했을 거다. 그런 센스는 동생에게 100 나에게 0을 물려주셨다. 휴. 어렵다.


집에 돌아와 얼른 된장국을 끓이고 돈가스도 튀겼다. 우주 먹을 만큼만 튀겼는데 어머님이 더 많이 튀겨서 같이 먹자고 하셨다. 어른들 먹을 것 좀 살걸 하는 마음이 그때 들었다. 아무튼 어렵다. 우주는 밥도 국도 싫고 돈가스만 마구 집어먹더니 나중에는 밥이랑 국도 잘 먹어줬다. 그리고 응가도 시원하게 했다. 비누를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오늘 우주 샤워는 패스했다. 한참 놀다 불을 껐더니 우주는 아쉽다며 울었다. 감정 표현이 다양해졌다. 창 밖을 더 구경하겠다고 침대에 앉아서는 조잘조잘 떠들다가 소리도 질렀다가 아쉬움을 풀고 금세 잠이 들었다.


걱정했던 시댁 1일 차는 다행히 무사하다. 부디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순조롭게 지나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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