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르 파리!
문제는 빵을 향한 나의 마음이었다.
동생이 제과점을 열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나는 디자인은 물론 동생이 하는 모든 일의 기획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포부가 컸다.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내겠다고 결심한지가 벌써 4개월. 그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다만 인스타그램에 '오늘은 요거 나왔어요-!' 하고 깨작거리기만 했을 뿐. 의미없진 않았다. 덕분에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와주신 손님들이 있었고, 그걸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음 한켠이 늘 답답했다. 오픈했다는 게시물을 올리고 나면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가끔 신제품이 나오거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빵이 나오는 날이 아니고서는 매번 같은 말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감을 일찍 한 날이면 감사하다는 문구를 달아 올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왜 그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하는 걸까.
문제는 동생의 빵을 향한 나의 마음이었다.
일요일은 제과점 휴무다. 여느 때처럼 교회에 다녀와서 가게에 잠시 들렀다. 내자리 청소를 좀 하고 어떤 소스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동생의 책장을 뒤져보았다. 어차피 전문가가 볼만한 레시피 책들은 내가 봐도 이해하지 못할게 분명해서 제목이 쉬워보이는 책을 꺼내보았다.
'봉주르 파리'
빵을 너무 사랑해서 결국은 파리지앵이 된 사람의 빵 이야기. 작가의 빵 이야기를, 파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나도 그와 같이 파리를 걸으며 파리의 맛있는 빵을 먹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만큼 작가의 어조에는 빵과 그것을 담은 파리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펼쳤던 책을 반 쯤 읽었을 때, 이미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젖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이 부족해 읽고 있던 부분을 표시 해둔채로 가게를 나섰다.
정말로 문제는 나의 마음이었다.
작가가 빵을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나,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재즈를 사랑한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질리거나 불편하지 않다. 누군가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곧 그 사람을 향한 애정이 가득 생기고 만다. 재즈를 틀어놓은 카페라면 어디든 합격이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라면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할 수 없다.
초밥을 사랑한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질리거나 불편하지 않다. 누군가 초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면, 그가 돈이 없더라도 내 지갑을 열어 함께 하고 싶다. 입맛이 없을 때라도 초밥이라면 언제든 합격이다. 초밥을 입에 가득 물고 나면 무표정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럼 내 동생을 향해서는? 그리고 그녀가 만든 빵에 관해서는?
나는 동생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생이 하는 일을 존경한다. 또한 그녀가 만든 빵을 애정한다. 중요한건 나의 마음이었다. 그 빵이 얼마나 좋은 빵인지 똑같은 말로 정보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모든 것을 향한 나의 마음으로 써내려가야만 한다. 언니가 들려주는 빵 이야기. 이런 제목이라면 사랑하는 동생의 존경하는 일을, 애정하는 빵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봉주르 파리의 저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