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일지 21-24

15개월 9일

by 마이문

주체성을 기반으로 한 육아 몰입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최대 빌런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자기 연민. '내가 이렇게 고생하네.'라는 아주 짧은 생각인데, 일순간에 잘 쌓아 둔 하루를 무너뜨린다. 자기 연민 빌런은 서방구가 집에 오면 자주 발동한다. 서방구가 조금이라도 궁둥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즉각 내 마음을 점령해버린다. 그러면 예민해지고 말이 퉁명스러워지고 상대방은 기분이 나빠지고 분위기도 차가워지고 덩달아 다시 내 기분이 더 바닥을 친다.


오늘은 늪에 빠지기 전에 빌런의 실체를 발견해냈다. 우주를 재우러 들어가 우리 둘 다 기절했다가 나 혼자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잠에서 다시 깼다. 서방구는 혼절 비슷한 상태로 깊이 잠들어있었다. 나는 약기운에 몽롱했고 이틀째 씻지 못했는데 또 열두 시가 넘어버려 언제 씻고 언제 자냐는 생각이 들어 억울했다. '나 씻는 것 좀 챙겨달라니까 혼자 쿨쿨 자기 바쁘네. 난 언제 제대로 씻어보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 문득 이건 아니지 싶었다. 계속 그리고 되물었다. '네가 정말로 불쌍하니?'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럼 좀 다른 선택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다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야!'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덟 시간을 자나 네 시간을 자나 피곤한 건 매한가지다. 좀 못 자는 건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부족한 잠은 가능한 날 채워도 된다. 개운하게 샤워하며 이틀 묵은 찝찝함을 씻어냈다. 이틀 못 씻는 건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두 가지나 그럴 수 있다고 흘려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성경을 읽고 마음을 정리하려고 글을 적는다. 새벽 3시 반이 되어 앞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지만 너무 괜찮다.


떠올려보면 자기 연민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다. 집안일을 할 때,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 식사를 건너 뛰거나 우주가 남긴 밥으로 해결해야 할 때, 내가 식탁에 앉아 밥먹는 꼴을 그냥 두지 못하고 기어코 내 무릎에 앉아 밥을 빼앗아 먹는 우주를 안고 어영부영 밥을 먹을 때, 가고 싶은 전시나 매장 소식을 인스타로만 봐야할 때 등등. 그래서 그게 불쌍한 건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우주와 내 삶에서 조금 다른 형태의 시간을 지내고 있을 뿐이다. 진짜 불쌍한 건 불쌍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를 연민하는 태도다.


자기 연민, 드디어 너를 발견했다. 앞으로도 날 찾아오겠지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거야. 정신 바짝 차려야지. 나를 알고 적을 알게 된 내일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