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26일
선우 취침 1:30
선우 기상 8:30
우주 기상 8:30
우주 취침 11:20
아침 일곱 시쯤 잠에서 깬 게 억울한 우주가 울길래 다시 눕혀 재우고 나도 자버렸더니 아뿔싸 8시 반이 되어있었다. 아침으로 간단히 식빵과 딸기 그리고 키위를 챙겨주었다. 나는 식빵에 크림치즈를 발라먹었다. 크림치즈는 사랑이다. 분명히 어제 정리했는데 밤사이 다시 난장판이 된 집을 가만히 바라보며 정리 욕구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금요일. 서방구가 일찍 오면 합심해서 정리할 수 있지. 드라마 서른아홉의 마지막 회를 보다 자꾸만 울컥해지는 마음을 잠재우고 서재에서 우주와 놀며 책꽂이에 쓰지 않는 물건을 정리했다.
일단 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일기장과 노트들을 책꽂이에서 빼내어 박스에 모두 담았다. 사실은 버리고 싶었는데 또 막상 꺼내보니 아깝다. 들여다봐야 이불킥 하고 싶은 일기장도 많은데 그래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몇 년에 한 번 들여다보는 일기장이 책꽂이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좀 낭비 같아 박스에 넣어두기로 했다. 한참 정리와 놀이 그 중간에 있다가 우주가 갑자기 배가 고팠는지 아침에 남긴 식빵에게 달려가 한입 가득 빵을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갑자기 찾아왔고, 당황한 나는 얼른 미역국을 데워 우주 앞에 주었다. 어제의 미역국 대참사가 오늘도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내 앞에 앉아 먹겠다는 우주를 데려다 놓고 드라마 서른아홉을 다시 켜 두었다. 숟가락질이 하고 싶은 건지 장난이 치고 싶은 건지 미역국을 밥그릇에 몇 번 옮기더니 이내 식탁 위를 초토화시켰다. 내 무릎 위로 떨어지는 미역국을 드라마에 흠뻑 젖은 슬픔과 함께 맞았다. 우주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미역 촉감놀이를 이어갔다.
만족할 만큼 먹고 놀고 내려가겠다기에 얼른 욕실에 데려가 물로 씻겨놓고 정리했다. 입으로 뭐 얼마나 들어갔겠나 했는데 꽤 먹었는지 배가 볼록했다. 오늘은 아울렛에 가서 기차를 태워주기로 어젯밤에 마음을 정했는데, 아침부터 하늘은 새파랗고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것이 딱 기차 타기 좋은 날씨라 기뻤다. 나도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무지하게 설레었다. 도착하자마자 기차 매표부터 하고 손님이 우리뿐이라 바로 탔다. 우주는 어리둥절하긴 한데 신기하고 재밌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두리번두리번 구경하며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엘리베이터를 두 번 타고 올라가 회전목마와 그물 놀이터가 있는 층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를 자꾸 타니 우주는 행복했나 보다. 작년 가을에 들렀을 때는 그물 놀이터 위에 서있는 것도 어려워했는데 오늘은 끝에서 끝까지 잘 걸어갔다. 회전목마를 발견하고는 타자고 소리쳤다. 말 위에도 못 타던 게. 재밌었는지 집에 와서 몇 번이고 회전목마 이야기를 하면 말 타는 시늉을 하고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아울렛에는 좋아하는 앤트러사이트가 있다. 커피까지 마시고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도 적당하고 우주 컨디션도 괜찮은 것 같아서 들렀다. 챙겨간 주스를 원샷 때린 우주를 위해 우유도 주문하고 같이 마주 보고 앉아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지갑 속 카드를 뺐다 꼈다 하며 놀고 엄마 아빠를 외치며 싱글 생글 웃었다. 대화는 아니지만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우주가 태어났을 때부터 대화가 가능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말은 못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걸 다 알고 이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주에게 말할 때는 언제나 우주가 이해한다는 전제로 말했다. 그게 엄마와 아기의 교감일까. 돌 이전의 다른 아기들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 교감으로, 감각으로 하는 대화는 엄마와 아기만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항상 통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내가 직접 가르쳐주지 않은 것도 기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거봐! 진짜 다 알고 있잖아!'라고 속으로 외쳤다.
함께 잠깐의 여유를 누릴 수 있을 만큼 크다니. 좀 더 과감한 선택에 도전해봐도 좋을 봄이 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꿀잠을 시작한 우주는 집에 올라오는 길에도, 나의 통화소리에도, 서방구의 귀가에도, 방 정리로 쿵쿵대는 소리에도 꿈쩍 않고 푹 잤다. 그 사이 서재 정리를 이어갔다. 편지와 추억이 담긴 물건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었다. 주고받은 마음이 이렇게나 많구나. 감사하며 새로운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했다. 비행기표, 전시회 티켓, 도록, 상표들, 엽서와 성적표와 학생증 그리고 기타 등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인 추억상자도 정리했다. 20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래, 이렇게 한 번 씩 열어 보는 게 이 많은 물품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지. 그러면서 또 환기되고 충전되는 것. 일기도 노트도 다 버리지 않기로 결심하길 잘했다.
다같이 돼지고기김치볶음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집안일과 우주 케어를 맡았다. 늦잠은 늦은 밤잠을 부른다. 우주는 아쉽고 아쉬운 밤을 미루어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덕분에 우리의 야식 스케줄은 처참히 무너졌다. 서방구는 기절했고 나도 이걸 다 쓰면 잘거다. 내일은 서울에 간다. 결혼식에 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무사하길 빌고 있다. 콧바람 넣고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