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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Lu Mar 09. 2016

#4. 매몽점(買夢店) : 자살 버스

"당신의 꿈을 삽니다"

#. 4 


 햇볕이 무척 따뜻한 오후였다. 노인은 겨우내 닫아두었던 갈색 문을 환하게 열었다. 가게 안에서도 입김이 나기는 했지만, 피부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햇볕이 있어서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뒤돌아 보니 환히 열어둔 갈색 문 앞으로 한 남학생이 서 있었다. 남학생은 교복 위로 두꺼운 파카를 입었는데 지퍼를 잠그지 않아 찬바람이 모두 목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노인에게 가게 앞을 서성이는 사람을 가게 안으로 들이는 일은 매우 자주 있는 일이었다. 모두 가게 앞에만 서면 이 가게가 맞나 싶은 마음과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쉽게 가게 안으로 들어 오질 못했다. 


“갈색 문을 찾아온 건가요?”


노인이 남학생에게 물었다. 


“갈색 문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간판이 없어서 여기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요하지 않아 간판을 달지 않았을 뿐, 찾으시는 가게인 것은 맞습니다.”


“왜 간판이 필요하지 않죠?”


“주변에 갈색 문 가게가 또 있던가요?”


“아니요.”


“그럼 간판이 필요 없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노인의 말이 맞았다. 주변 가게들은 모두 유리문이었지만 이 가게만큼은 갈색 문이었다. 가게는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말 거면 말라는 듯이 불친절하게 서 있었지만 막상 가게 안을 둘러보니 생각과는 달리 가게는 평범하고 따듯한 분위기였으며 남학생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듯했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닌가요?”


 “아, 개교기념일이에요.” 


 남학생은 개교기념일이라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니 교복을 입고 있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해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더 이상 질문이 없었다. 가게에 들어오긴 했지만 우두커니 서 있는 남학생에게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말했다. 

남학생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을 가게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그 나이 또래는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에 대해(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이였다. 마치 어미 사자에게 쫓겨나 홀로 평야를 헤매다 다른 무리를 마주칠 때마다 수풀에 숨어 경계의 시선으로 세상 모든 것에 적대심을 갖고 바라보는 어린 수사자의 그것과 비슷한 나이. 

온기가 가득한 찻잔을 남학생에게 건네며 마주 앉은 노인은 남학생에게 꿈을 파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남학생이 준비되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학생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요. 꿈에서 저는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있었어요.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은 별로 없었어요. 고작해야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 몇몇 가족들, 연인들 정도…… 놀이공원 중앙에는 커다란 관람차가 있었어요. 관람차 기둥은 모두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제 다리가 시릴 정도로 추워 보였어요. 기둥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 추워지는 그런 기분. 꿈에서 너무 추워서 대체 왜 이런 날 여기로 놀러 온 거야 싶었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저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른 녀석들은 모두 신이 나서 무엇을 먼저 타고 놀까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친구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어요.”


 남학생은 꿈에서 추위를 느꼈다는 부분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꿈속에서 자신은 몹시 춥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몸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지만 뇌에서 춥다고 말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그 부분을 고쳐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노인을 보니 개의치 않은 것 같아 그 부분은 넘어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저와 친구들은 관람차가 서있는 광장에 서있었어요. 그때 웬 버스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어요. 하얀색 대형버스였는데 빠른 속도로 저희 쪽을 향해서 달려오는 거였어요.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 앞에는 애들 장난감이나 풍선 같은 것을 파는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가게와 부딪히겠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버스는 가게를 무시한 채 무서운 속도로 계속 달렸고 결국 가게 옆부분에 '쾅'하고  부딪혔어요. 버스가 멈출 줄 알았는데 버스는 멈추지 않더군요. 가게 주변에 서있던 진열대며 매달려있던 동물 모양의 풍선들이 모두 부서지고 흩어진 채 날아 갔어요. 그제야 우리는 버스가 달려오는 방향의 바로 정면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남학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입고 있던 두꺼운 파카를 조심스럽게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가게는 난로의 온기 덕에 따뜻했다. 남학생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가게 밖의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듯 이야기하는 내내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버스는 다시 한번 더 속도를 올려 달렸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렸어요. 사람들은 버스를 피해 넘어지고 부딪히며 도망가고……. 저 역시 정면으로 달려오는 버스를 피하고자 혼비백산으로 옆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그 넓은 광장 바닥에는 마치 중앙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버스는 방향을 바꿀 생각 없이 정면으로만 달렸어요. 옆으로 한참 비켜선 후, 버스가 대체 어디를 향해서 달리는 거지 싶어서 보니 그곳에는 관람차가 서있었어요. 버스는 관람차가 최종 목적지라도 되는 것처럼 결코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지 않았어요.”


 남학생은 파카를 벗고 나니 한결 숨 쉬기가 편해졌다는 생각했다. 노인은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치 남학생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질 수 있도록 모든 감각의 초점이 남학생의 말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을 보니 여기저기 넘어진 사람들과 기념품 가게가 부서지면서 날아간 파편에 맞은 사람들이 길에 피를 흘리며 있었어요. 그리고 기념품 가게 안에 있었던 직원이었는지 유니폼을 입은 한 남자가 가게 주변에서 얼굴에 피범벅을 한 채 주저앉아있었고요.”


 남학생은 그 피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남학생은 피를 보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몇 년 후에 의대를 가야 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웃길 일이었다. 피를 보지 못하는 의대생이라니. 과연 1년도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남학생은 의대에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암 전문의인 아버지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 그리고 성형외과 의사를 지망하는 의대생 형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일이었기에 남학생은 자신이 이 가족의 일원이 맞기는 하는가 싶었다. 마치 자신의 피 속에는 이 집안의 피가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학생은 의대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학생의 부모는 단 한 번도 남자에게 의대를 지망하는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느 의대를 목표하는지, 무엇을 전공 삼을 것인지 궁금해했다. 의대에 가고 싶냐는 질문은 단 한 번도 꺼내진 적이 없었다. 남학생의 부모에게 그 질문의 답은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사자의 무리에서 태어나서 앞으로 육식을 할 것이냐 채식을 할 것이냐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버스는 결코 멈출 생각이 없었어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버스는 계속 달렸어요. 파란색 관람차를 향해서.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깔아뭉개면서 달리며 제 옆을 지나갔죠. 그때 봤어요. 그 버스에 가득 타고 있던 사람들을. 버스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어요….”


 남학생은 알고 있었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 중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창문에 타고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남학생은 자신의 두 눈으로 정확히 보았었다. 분명히 같은 반 학생이었던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전학 갔다고 말했지만 대부분 그 학생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리지도 그렇게 순박하지도 않았다. 같은 반 친구가 자살했다는 것은 제법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용기 내어 선생님에게 진실을 묻거나 친구의 장례식을 찾아갈 생각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다만 뉴스에서나 보던 자살 소식이 반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한동안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끊임없이 화젯거리로 올라왔다.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하게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아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아파트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깨졌지만 바로 죽지는 않았데’

‘난 즉사했다고 들었는데?’

‘유서가 있었데’

‘걔네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데’

‘걔가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것을 옆 반의 누구 엄마가 봤다던데’

‘원래 자살 시도를 몇 번 했다고 들었어 그래서 걔 좀 말도 없고 얘가 이상했잖아’


누구 하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의 입을 오가는 이야기 중 더 자극적이고 호기심이 드는 이야기는 눈덩어리에 살이 붙듯 커져만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한 남학생의 이야기는 점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자살한 그 학생이 자신의 꿈에 나타났다는 것에 남학생은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학생은 그 친구의 이름 조차 꿈을 꾸기 전 까지는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몇 분 안에 자신들에게 생길 일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표정이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때 버스에 타고 있던 낯익은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 밖의 저를 쳐다봤어요. 버스는 아주 빠른 속도로 저를 지나쳤지만 저는 분명히 봤었어요. 그 얼굴을. 절 바라보던 그 얼굴을……. 걔는……몇 달 전 자살한…… 저희 반 애였어요.”


남학생은 불안해 보였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하는 내내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남학생의 불안은 전염병처럼 노인의 가게를 가득 채웠다. 단 한 사람, 노인만이 그 전염병에 내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익숙한 풍경이라도 바라보듯 남학생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주변 사람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노인은 좀처럼 손님이 꿈 이야기를 할 때는 질문을 하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학생은 노인을 바라보며 노인이 입을 열고 가게 안에 노인도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흔하진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겠죠.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국가라 해도 그런 경험을 안고 사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경험이 있나요?”


“아저씨는 있으세요?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


노인은 말이 없었다. 남학생이 대화를 원하는 것인지 공감을 얻기 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입을 열면서부터 남학생 주변의 지독히도 무겁던 공기가 조금 가라앉은 느낌을 보아하니 오늘만큼은 노인이 고수해오던 규칙을 잠시 내려놔야 할 것 같았다. 


“환자 중의 한 명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남학생은 노인의 말에 처음으로 노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학생의 눈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노인의 말에 두려움 위로 호기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로 일을 할 때 만난 환자였지만 결국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던 거죠. 살면서 누군가를 그런 방식으로 잃게 된다는 것은 피할 수만 있다면 정말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치료가 실패했나요?”


“그런 셈이죠. 모든 의사가 수술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듯 정신과 의사도 모든 치료에 100% 성공을 하진 못합니다. 적어도 그 환자와의 마지막 상담 때는 충분히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어쩌면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 같더군요. 은퇴를 앞두고 대부분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해졌던 거지요. 익숙해졌던 것….”


남학생은 말이 없었다. 노인의 아픈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게 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자신의 어깨 위에 얹은 기분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노인의 말에 모두가 나름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버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노인이 말했다. 


“버스는 파란색 관람차를 향해 달렸어요. 사람들을 가득 싣고. 그 친구도 태운채. 바퀴 아래 모든 것을 짓밟으며. 아주 빠른 속도로. 파란색 관람차 기둥을 들이박고 나서야 버스는 멈췄어요.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관람차의 파란색 기둥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허수아비처럼 관람차가 앞뒤로 몸을 흔드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버스 위로 모든 것이 쏟아내려 졌습니다. 여기저기 폭발하고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폭발의 파편처럼 부서져 하늘을 뒤덮이며. 그렇게 버스는 관람차의 폭발 속으로 사라졌어요.”


남학생은 이야기하는 내내 물어뜯던 손톱을 입에서 내렸다. 얼굴을 반쯤 가리던 손이 내리자 그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슬픔이 헐벗겨진 채 드러났다.  


“버스가 자살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그 버스는 자살버스였어요….”


남학생은 꿈에서 깨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듯 말했던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자살버스. 남학생이 보았던 버스에 탄 사람들의 시선은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버스의 결말을.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는 동시에 그들은 원했다. 그 버스는 자살버스였다. 

 

“걔는 또 자살한 거예요. 제 꿈에서. 보란 듯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제가 그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에 대해 벌하듯이….”


“왜 그렇게 생각하죠?”


노인이 말했다. 남학생은 고개를 떨군 채 무릎 위 자신의 흉측하게 뜯어진 손톱을 만지며 말했다. 


“반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그런 애 있잖아요. 걔가 좀 그런 애였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다고 그렇게 괴짜 같지도 않았고 그냥 최선을 다해서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어요. 아무도 관심이 없었죠. 차라리 그게 낫지. 병신처럼 맞고 다니는 불쌍한 놈들 보단. 적어도 맞지는 않았거든요. 걔가 자살했던 날, 미술수업이 있었어요. 미술실로 이동해서 다들 이젤 앞에 앉아서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죠. 저는 번호순대로 걔 옆에 앉아있었어요. 원래는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한 녀석이었는데 처음으로 저에게 먼저 말을 걸더라고요. 준비물을 놓고 왔다고. 그 말이 뭐 얼마나 어렵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덜덜 떨며 말하는 거예요. 그냥 그때는 그게 대게 우스웠어요. 일부러 ‘뭐라고?’ 크게 물었죠. 그 녀석은 더 기는 목소리로 준비물을 놓고 왔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다들 들으라는 듯이 ‘뭐 어쩌라고 그래서’라고 크게 말했어요. 주변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어요. 그 자식,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귀까지 빨개지더라고요. 결국 미술수업 내내 텅 빈 이젤 앞에 앉아있기만 하더군요. 가져온 물감을 건네 볼까 했지만 그게 뭐라고 빌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그 자식이 그때는 왜 그렇게 멍청하고 웃기던지.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어요. 그렇게 미술수업이 끝나고 모두 교실로 돌아갔어요. 걔가 교실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대로 수업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갔고…. 그 다음날부터 그 녀석은 학교에 오지 않더군요. 며칠이 지난 후에야 그날 저녁에 걔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다들 미술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었어요. 계속 속으로 몇 번이고 다시 그날 미술시간에 했던 제 말들을 떠올리고 떠올리고 다시 떠올리고….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자살버스가 나오는 꿈을 꾼 이후로 누구든 붙잡고 미술시간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몇 번이나 생각해도 물감을 빌려주지 않았다고 자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문제였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그 꿈을 꾼 후로 지나가는 버스마다 모두 그 자살 버스로 보였어요. 그리고 계속 버스가 관람차를 들이박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기 전에도, 밥을 먹을 때도….”


“강렬한 꿈을 꾸고 나면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그러다 보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기억이란 것은 제 마음대로 재구성이 되기도 하지요.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산을 타고 내려오는 눈덩어리처럼 거침없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가게를 하고 있지 않겠지요.”


노인은 다정하게 웃었다. 노인과 남학생 앞의 찻잔은 가게 안의 찬 공기와 뒤섞여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노인은 조용히 일어나 난로 온도를 조절했다. 그리곤 주전자 포트의 버튼을 눌러 다시 물을 끓였다. 


“꿈은 많은 것을 보여 줍니다. 잠재적 의식이 투영된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학생은 잊고 살았다고 했지만 가슴 한 쪽에는 그 일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죄책감을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가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유는 그 친구만이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친구가 안고 있었을 문제는 이제 와서 학생이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꿈이 학생의 삶을 갉아먹기 시작했다면 그 문제는 학생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데 익숙하지, 스스로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저 꿈에 지배당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 속에 학생을 옭아매고 있던 그 죄책감을 마주하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본다면 어떨까요.”


“정말 의사 선생님 같은 말씀이네요.”


남학생은 가게에 들어선 이후로 처음으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꿈은 많은 것을 보여주며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나름의 문제와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있지요. 꿈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무의식 속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꿈을 사는 가게를 차리신 건가요?”


노인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퇴한 정신과 의사의 종착역 정도일 뿐입니다.”


남학생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벗었던 파카를 다시 입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야 할 곳이 생각났어요.”


노인은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가운데 봉투를 꺼내 들자 남학생이 말했다. 


“아, 괜찮아요. 이미 값을 받았습니다.”


남학생은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갈색 문을 열고 나갔다. 남학생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구겨진 메모지를 꺼냈다. 메모지에는 손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벽제 납골당’


남학생은 메모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 갈색 문을 한번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겨 골목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큰길이 다다르자 버스 정류장이 눈에 보였다. 노선을 확인한 남학생은 버스 정류장에 섰고 남학생의 앞으로 시내버스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시내버스에 타고 있던 한 여자아이가 창밖의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아이는 남학생을 보며 싱긋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바비인형을 흔들어 보였다. 남학생 역시 여자 아이를 보며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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