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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Lu Mar 07. 2016

#3. 매몽점(買夢店) : 딸기 아이스크림

"당신의 꿈을 삽니다"

#3. 


“차라리 꿈이 현실보다 나아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지쳐 보였다. 여자로서의 생기가 사라진 주름진 얼굴과 칙칙한 피부, 두 번의 출산 이후 여기저기 붙은 지방 덕에 구불구불 길을 잃은 그녀의 살집들이 아직 40대 중반인 그녀를 50대까지 늙어 보이게 도와주었다. 그래도 그녀의 몸은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여자였고, 그녀의 얼굴도 (역시 따지고 보면) 분명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여성성이라고는 대충 뒤로 묶은 긴 머리카락과 문을 나서기 직전에 입술에 바른 립스틱 자국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잠만 잤으면 좋겠어요. 꿈에서 만큼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하잖아요.  지긋지긋한 현실도 다 사라지고 밥을 할 필요도 없고 밥을 먹을 필요도 없고 꿈은 현실에서처럼 해야 할 일들이 없잖아요. 꿈에서만큼은 누구 엄마도 아니고 누구 아내도 아니고 그냥 나일 수가 있으니까. 그냥 현실이랑 꿈이랑 바꿔서 현실을 하루의 4분의 1만 살고 나머지는 다 꿈속에서만 살 수는 없을까.”


 여자의 지친 표정이 여자의 말이 진심임을 고백했다. 노인은 작은 그릇과 함께 여자에게 차를 건넸다. 여자는 노인의 가게에 처음 오는 것이 아니었고 노인은 여자가 오랫동안 티백을 차에 담가 놓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여자는 티백을 꺼내놓을 작은 그릇을 찾았고 어느 때부터인가 노인은 말하지 않아도 여자에게 티백을 꺼내놓을 그릇도 함께 건넸다. 여자는 노인에게 감사의 고갯짓을 보이고는 찻잔 속의 티백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컵 안으로 녹색 물이 연하게 퍼지자 티백을 꺼내 그릇에 담았다. 


 “한 번은 정말 그렇게 해볼 생각으로 하루 종일 잠만 자려고 했어요.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켜놓고 다시 침대로 들어갔지만 낮에 잠을 자는 것도 일이더라고요. 잠들만하면 창 밖으로 중고제품을 산다는 트럭이 오가면서 확성기를 울려대질 않나, 케이블 방송을 바꿔보라는 쓸데없는 전화가 오질 않나. 다시 침대로 누우니 방구석에 언제 벗어서 던져놓은 지 싶은 남편의 양말이 보이지 않겠어요. 그냥 무시하고 다시 자자 싶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남편의 양말을 들고 세탁기로 향했죠. 세탁기에다가 양말을 넣고 다시 침대로 가야지 싶었는데 세탁기에는 또 빨래가 어찌나 많던지. 얼굴 닦은 수건은 다시 좀 쓰지 그냥 세탁기로 던져버리는 얘 아빠나 얘들 덕분에 세탁기는 파업할 날이 없죠. 다들 빨래 좀 해보면 빨래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한 번도 안 해봤으니 뭘 알겠어요. 그저 세탁기만 돌리면 끝인 줄 알아요. 얼굴 닦은 수건은 세탁기로, 머리 감은 수건도 세탁기로, 발 닦은 수건도 세탁기로. 정말 지긋지긋해.”


 여자의 말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인은 어떻게 해야 여자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잘 안다는 듯이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결국 하루의 4분의 3을 꿈꾸는 것은 실패하신 건가요?”


 여자는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듯이 노인에게 답했다.


 “네. 세탁기를 돌리고 나니 아침 먹고 남은 설거지가 보이더라고요. 저것만 해치우고 다시 자자 싶었지만 설거지하고 나니 둘째가 방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들이 보였고 할 수 없이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친정에서 전화가 왔길래 통화하다 보니 뭐…. 또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죠.”


 여자의 친정엄마는 새엄마였다. 그녀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1년도 안돼서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당시 사춘기였던 여자는 새엄마가 무척 미웠다. 세상의 모든 새엄마를 동화 속에 나오는 계모로 일반화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친엄마의 빈자리가 익숙해지기도 전에 다른 여자로 대체되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모녀라는 각자의 위치에 서로를 적당히 구겨 넣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 '모'와 '녀' 사이의 거리는 무언의 타협 아래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단 한 번도 좁혀진 적이 없었다. 여자는 결혼하자마자 친정과의 왕래를 거의 끊다시피 했다. 원래 아버지와의 관계도 단 둘이서 찍은 사진이 가족앨범 한 권을 탈탈 털어야 두세장 나올 정도였기에 아쉬운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게다가 새엄마와 어색한 '모'와 '녀'의 연기를 펼치는 것보다, 명절 내내 시댁 싱크대 앞에 서있는 것이 더 참을만했다. 

 하지만 여자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나서, 새엄마가 여자의 아버지 대소변을 거리낌 없이 받는 모습을 본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여자는 결코 아버지의 대변이 묻은 엉덩이를 손으로 닦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새엄마는 아침이면 일어나서 세수를 하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새엄마의 부탁대로 기저귀를 배송해주거나, 병원비나 필요한 의료기기들의 값을 대주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속에서는 새엄마가 마음을 바꾸고 집을 나가버려서 결국 외동딸인 그녀가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이번 꿈은 정말 재미있어요. 아저씨도 좋아할 거예요.”


여자는 방긋 웃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반쯤 비운 여자의 컵에 뜨거운 물을 다시 부었다.


 “며칠 전 꿈이었는데 아저씨한테 어찌나 들려드리고 싶었는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노트에 마구 적어놨을 정도예요. 노트에 대충 적어놓고 또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 다시 침대에 와보니 그제야 꿈이 생각나더라고요. 제가 뭐라고 적었는지 알아요? 아이고 푼수같이.”


여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이름 알아 명령 따ㄹ기 아스크림 해야해 싫어 구름 공룡]


 딱 봐도 눈 뜨자마자 꿈을 기억하기 위해 다급히 휘갈겨 쓴 메모였다. 여자는 종이를 다시 구겨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말했다.


 “그래도 내 꿈이라고 이걸 보자마자 기억나는 거 있죠.”


여자는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노인은 그녀가 가게에 올 때마다 처음에는 불평을 늘어놓다가도 꿈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그 패턴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 저는 공항이었어요. 생전 비행기 한번 타본 적이 없지만, 첫째 방학 때 언어연수니 뭐니 잠깐 미국에 보내느라 그때 처음 가봤어요 공항은. 지 엄마는 제주도 한번 못 가봤는데 반 친구들은 다 어학연수라고 미국이고 캐나다로 간다고 엉엉 울면서 보내 달라고 떼쓰는 자랑스러운 딸 덕분에 가본 공항이었어요. 쥐꼬리만 한 남편 월급에서 어떻게 모은 돈인데 비행기 값이며 학교 기숙사비며 겨우 한 달 보내는데 다 썼지 뭐예요. 저도 비행기 타보고 싶었는데, 저라고 미국 안가보고 싶나요.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몰라요. 가족을 위한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니.”


 여자는 자신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아무리 20대의 피부를 가진 중년 여배우라 해도 손만큼은 세월을 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손은 세월의 상징이었다. 굳은살로 두텁고 주름진 여자의 손은 자신의 나이를 그대로 증명해주는 듯했다. 여자는 처녀시절에 참 고왔던 자신의 손이 기억나질 않았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할 때 남편은 여자의 손이 곱고 예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여기, 그녀의 손은 더 이상 곱고 예쁘지 않았다. 그저 깊게 패인 주름과 굳은살로 솥뚜껑처럼 투박해 보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손이었다. 


 “공항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가득했어요. 거기는 항상 바빠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하잖아요. 그때 등 뒤에서 누가 저를 불렀어요. 제 이름을. 정이 엄마도 아니고 여보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니고 제 이름 석자를 말이에요. 아저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나이 정도 되면 이름 쓸 일이 별로 없어요. 나가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살림만 하는 아줌마이니 집에서는 여보, 혹은 엄마라고 부르고 밖에서는 뭐 정이 엄마나 아줌마가 전부예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제 이름으로 절 부르셨었는데 쓰러지신 이후로는 절 알아보지도 못하시니 이젠 저 조차도 제 이름이 낯설 정도예요. 평생 불려 온 이름인데 몇 년 동안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낯설어진다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하죠.”


 여자의 친엄마는 소설가였다. 유명한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 서점에 가면 그녀의 어머니 소설이 한두 권은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표지에는 그녀의 친엄마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집 책장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있다. 다만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 만이 그 책을 찾는 독자였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부러웠다. 어렸을 때, 집 전화를 받으면 종종 ‘ooo작가님 계시나요?’ 하면서 엄마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의 이름은 책에서 뿐만 아니라 전화에서도, 밖에서도, 서점에서도 불렸고 쓰였다. 아직도 몇몇 중고 서점에는 엄마의 이름이 새겨진 책들이 있을 것이다. 엄마의 이름은 죽어서도 호랑이 가죽처럼 남았다. 딸의 이름은 꿈에서나 불리지 않으면 누구도 찾지 않는 이름이었는데. 이름을 잃은 그녀는 그저 누구의 엄마 아니면 아줌마가 전부였다. 손도 아줌마, 얼굴도 아줌마, 몸매도 아줌마. 그녀는 그런 자신을 혐오했다. 


 “그렇게 꿈에서 이름을 불러주니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내 이름을 쓰지 않았는지 실감이 나더라고요. 아무튼 제 이름을 부르기에 뒤돌아봤는데 누군가 서 있었어요. 서 있다고 하기 어렵지만 누군가 있기는 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고 그게 그 사람 얼굴을 봤는데도 모르겠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가 있다고만 인지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그 날, 그 꿈의 규칙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어요.”


 여자는 노인에게 꿈 이야기를 할 때면 규칙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녀는 꿈을 아주 많이 꾸는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매일 밤 꿈을 꿨고 다음날이면 친구들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예지몽이라고 여기며 나쁜 꿈을 꾼 날이면 하루 종일 몸을 사렸다. 어른의 삶을 쫓다 보니 꿈에 대한 그녀의 순수한 집착은 줄었지만 이 가게를 소개받은 후로 그녀는 매일 밤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3번이나 갈아타고 찾아와야 하는 거리지만 그녀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 가게가 좋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자신의 꿈을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이 노인만큼은 어떤 논리적 설명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종종 여자의 꿈 이야기에 [왜]를 던지는 몰상식한 사람들과는 달리.  


‘왜?’


 그것은 그녀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공격이었다. 왜라니, 꿈이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답변을 받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그녀의 꿈 이야기에서 실낱같던 호기심마저 잃어버렸다. 글쎄, 아마도 내가 최근에 이런 고민들에 빠져 있었는데 그 고민들이 이런 식으로 꿈으로 나왔나 봐.라는 그녀의 빈수레 같은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겨우 건진 표정으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가 원하는 대화가 아니었다. 그녀는 꿈에 대한 해석 조차 꿈을 강간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꿈은 꿈으로 존재할 때 온전한 것이지, 꿈을 해석하려고 하는 순간 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을 겁탈하는 일과도 같았다. 꿈에는 논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측 불가능한 꿈의 전개를 즐겼고 꿈꾸고 있을 때 더 자신으로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에게 꿈을 꾸는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었고 현실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사실 노인의 가게를 찾아오기 전까지 그녀의 꿈에 대해 ‘왜’를 던지지 않은 사람은 그녀의 죽은 친어머니가 유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꿈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늦은 밤, 무서운 꿈이라도 꾼 날이면 그녀는 훌쩍이며 안방으로 달려가 잠든 어머니를 깨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와 그녀를 품에 안고 꿈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꿈일 뿐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랬구나. 괴물이 있었구나.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니?’라며 차분히 그녀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녀는 훌쩍이며 어머니에게 꿈을 이야기했고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두려움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에 다시 눕혀주었다. 그 시간만큼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어머니는 그 시대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였고 어머니와 아내라는 역할은 우선순위에서 아주 멀리 있었다. 그랬기에 여자는 어머니의 모든 시각과 청각을 자신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무척 소중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파마머리에 형형색색의 이상한 옷들을 입은 친구들의 엄마와는 달리 그녀의 엄마는 언제나 세련되어 보였다. 작가라는 여자의 어머니를 주변 친구들이며 친구들의 엄마며 선생님이며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전형적인 파마머리가 아닌 세련되고 단정한 머리스타일과 맵시 좋은 정장을 입은 날씬한 자신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와 담임선생님과 진학 상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여자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말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예요! 저기에 우리 엄마가 앉아있어요!라고. 여자는 항상 자신의 어머니처럼 늙고 싶었다. 여자의 어머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웠고 고상했다. 여자의 어머니는 장례식장 영정 사진에서 조차 젊고 아름답고 고상했다. 


 “그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저는 온몸이 굳는 느낌이었어요. 그 누군가는 저에게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딸기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말했어요. 사실 전 딸기 아이스크림을 끔찍이 싫어하거든요. 어렸을 때,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심하게 체한 이후로는 딸기로 만든 요구르트나 딸기 맛 사탕이나 아무튼 딸기라는 글자가 붙은 것은 진저리 날 정도로 싫어해요. 얼마나 싫어하냐면 아이들이 먹고 남기면 버리기 아까워서 뭐든 먹어치워 버리는 편인데 딸기와 관련된 것은 눈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바로 버릴 정도라니까요. 그런 저에게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사형과도 같은 일이죠. 그런데 저는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으로 걸어갔어요. 마치 제 발과 제 생각은 따로 노는 것처럼 제 머릿속으로는 싫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제 발은 아이스크림 가게로 걸어가는 거예요. 마치 재 영혼이 몸 안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어요. 제 입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딸기 아이스크림을 말했고 제 손에는 콘에 담긴 딸기 아이스크림이 쥐어졌죠. 정말 토 나올 것처럼 역겨울 정도로 괴로웠는데 제 손은 제 입으로 그 아이스크림을 가져가는 거예요. 제 입은 그 딸기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여 먹더군요. 누가 보면 한 일주일 굶은 사람인 줄 알았을 거예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을 손에 받든 것처럼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저는 계속 속으로 비명을 질렀어요. 하지만 제 입과 제 몸은 아랑곳 안 하고 그 아이스크림을 남김없이 먹었어요. 어머머, 이것 봐요. 소름 돋은 것봐. 이 정도로 싫어하는데 말이에요.”


여자는 노인에게 자신의 옷을 걷어 팔에 돋은 소름을 보여줬다. 노인은 그녀가 꿈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녀의 팔을 보는 척 얼굴을 들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제 몸이 그 딸기 아이스크림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는 거예요. 이윽고 제 등 뒤의 그 누군가가 다시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 누군가는 제 이름을 너무나 측은하게 부르더군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를 부르는 것처럼. 저는 그가 부르는 제 이름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어요. 붙잡을 수만 있다면 손에 꽉 쥐고 다시는 놓고 싶지 않을 정도였죠. 그는 다시 제 이름을 부르고는 창 가로 가라고 하였죠. 아시다시피 공항의 벽은 커다란 창으로 되어있잖아요. 밖이 환히 보이는 엄청나게 높고 넓은 창 말이에요. 또다시 제 발은 창으로 걸어갔어요. 창이라고 해야 할지 벽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창에 이르자 그 누군가는 제게 창 밖의 하늘을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창 밖의 하늘을 보았는데 구름이 가득했어요. 구름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양이 있었어요. 어떤 구름은 목이 긴 공룡 같은, 어떤 구름은 비행기 같았고, 어떤 구름은 양이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여자는 8살 소녀가 된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그들이 앉아있는 작은 가게 주위로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하나 씩 가리켰다. 


 “어렸을 때는 하늘 위의 구름에 하나하나 모두 이름을 붙이며 놀았었는데. 매번 바라보는 하늘이었지만 구름의 모양을 비행기로 양으로 상상해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몰라요.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구름마다 모두 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것 같았어요.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와는 달리 제 몸이라는 껍데기와 그 안에 차있는 제 자신이 모두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제 눈도 구름을 보고 있었고 저 역시 구름을 보고 있었어요. 그때 창이 점점 멀어졌고 제 눈을 가득 찬 공간이 모두 거대해졌어요. 그제야 제가 아주 작아졌다고, 아니 제 몸이 아주 작아졌다고 알 수가 있었죠. 아, 정말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어디든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어렸을 때 그랬듯이 숨이 찰 때까지 마구 달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제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가 제 눈에게 창 밖의 하늘을 보라고 했으니 제 눈은 창 밖의 하늘을 봐야만 했죠. 그래도 구름들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기에 저는 조금도 슬프지가 않았어요. 되려 제 이름을 부르고 저를 움직이게 만드는 등 뒤의 존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죠.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되려 해방된 느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즐기면 될 뿐, 제 몸과 제 행동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됐어요. 내 의지라면 절대 먹지 않았을 딸기 아이스크림이며 내 의지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구름들까지. 평온했어요. 평온 그 자체의 순간이었어요.”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그 평온함을 느껴보려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깼어요. 잠에서 깨고 나니 어린 녹차 잎 차를 마신 그런 느낌이었어요. 혀 끝으로 단 맛이 살살 도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뱃속까지 따뜻해진 느낌. 정말 기분 좋은 느낌이었어요.”


 노인이 책상에서 꺼내 온 봉투를 받은 여자는 노인에게 인사하고 갈색 문을 열고 나갔다. 


여자는 단 한 번도 노인에게서 받은 봉투를 열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봉투 안의 액수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봉투 안을 보고 금액을 센다거나, 봉투 안에 든 돈을 쓴다는 것은 꿈을 강제로 해석하는 일과 같은 일이었다. 매번 노인의 서랍에서 나온 봉투들은 그대로 여자의 화장대 서랍 속 여자만이 아는 틈새로 들어갔다. 


몇 년 후, 여자는 자신의 죽은 어머니처럼 횡단보도를 건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했고 병원으로 이동하던 중, 앰뷸런스 안에서 숨을 거뒀다. 여자가 차 사고를 당한 후, 남편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봉투들은 모두 화장대 서랍에서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여자가 살아있었을 때 말버릇처럼 자신이 죽으면 제발 영정사진을 만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기에 여자의 장례식에는 영정사진이 없었다. 그저 여자의 이름 석자가 새겨진 종이만이 여자의 장례식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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