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을 삽니다"
#2.
노인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날 손님은 남자였다.
비싸보이는 맞춤 양복을 입고 유명 브랜드 안경을 쓴 젊은 남자는 노인과 가게를 번갈아 보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값을 매기고 있었다. 8평 남짓의 가게는 주변 시세에 비례하여 부동산 가치로 얼마나 될지, 노인의 행색을 보아하니 노인의 형편이 어느정도 되는지 딱 봐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는 연예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는 이러한 가게를 운영하며 늙어가는 노인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저 우습기만 했다. 남자는 자신의 소파인양 안쪽에 자리를 잡고 다리를 꼬고 앉아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은 거만한 남자의 행동과 표정, 자신을 우습게 바라보는 듯한 눈길 따위 게이치 않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아우라에 노인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싶었던 남자는, 되려 노인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노인의 시선은 남자의 척추를 강한 힘으로 쥐어 짜는 듯했다. 애써 자신의 양복을 손으로 툭툭 털어보며 시선을 돌린 채 남자가 말했다.
“재밌네요. 이런 가게.”
불편한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던지듯 말을 꺼냈지만 자신의 얼굴을 여유있게 바라보고 있는 노인과는 달리 남자는 노인의 눈을 피하고 있음을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했다.
“꿈의 단가나 뭐, 그런 것도 있나요?”
“제 가게의 영업방식에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좋은 꿈이면 좋은 가격에 사고, 거짓 꿈이라면 여기 까지 오신 수고비 정도만 드리죠. 액수도 그때 그때 꿈 이야기를 듣고 제 마음대로 정합니다. 아시다시피 꿈을 파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기준이 없지요.”
“수고비라, 뭐 버스비라도 주시는 겁니까? 택시를 타고 왔으면 택시비를 주시는건가요?”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남자의 세계에서 돈은 결정권을 쥔 중요한 실권이자 전부였다. 소속된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값이 정해진 소유물이었고 그들의 연기나 목소리 역시 그 가치에 따라 값이 정해졌다. 뜻밖의 운으로 그 가치가 몇배로 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상향선보다 하향선을 타기 마련이다. 남자는 세상 모든 것에는 가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치가 정해지는 모든 것들은 돈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가치가 있는 것들을 주변에 두고자 했다.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도, 근처에 세워둔 자신이 아끼는 수입차도, 자신이 입고 있는 값비싼 양복도 모두 남자 자신의 가치를 대변해주는 것들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이 가게를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꿈의 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그는 한번도 꿈에 대해서는 값을 매겨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 오래된 밥솥같은 노인이 자신의 꿈에 대해 어떤 값을 줄지 궁금했다.
“뭐 자주 꾸는 꿈이 있어서 와봤습니다.”
“같은 꿈을 자주 꾸시는 건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꿈이어도 결국 비슷한 상황에서 깬다고나 할까. 그런거 있잖아요.”
“그럼 가장 최초의 기억으로 꿈을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최초의 기억이라….”
최초의 기억 속 꿈의 배경은 그의 어린시절 동네였다.
그가 태어나고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가 분명했다. 남자의 집은 사실 집이라기보다는 방이었다. 평범한 집에 방하나를 빌려 월세를 내며 살았다. 방 안에는 낡아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밥솥 하나와 냄비 하나 올리면 끝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 어머니가 시집 오며 들고 온 낡은 이불이 전부였다. 거실에서 주인집이 TV를 보는 소리가 들리면 방문에 온 몸을 붙이고 그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남자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남자의 기억속에는 계절처럼 집을 찾아와 계절처럼 떠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대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식당에서 습진에 가득차 퉁퉁 부은 손으로 일을 하던 어머니가 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아들을 혼자 두고 집을 나서는 것이 두려워, 매일 아침이면 밥 한공기와 건더기 없이 뿌연 국물 뿐이던 국이 담긴 냄비를 아들이 잠든 방에 넣어두고는 방문을 걸어 잠구고 일을 갔다. 화장실을 가려면 주인집 거실로 나가야했지만, 주인집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화장실을 못쓰게 괴롭혀 대서 어차피 주로 방 안의 요강을 사용해왔기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남자의 어렸을 때 기억은 벽지가 너덜 너덜 떨어져 콘크리트가 그대로 헐벗어 제 살을 드러낸 벽과 차갑게 식은 밥, 숟가락으로 아무리 헤집어봐도 배추 몇 잎이 전부인 국, 그리고 반지하 창 밖으로 힘겹게 비집고 들어오는 약간의 햇볕이 전부였다. 남자가 방에 혼자 남겨져 있는 시간 동안은 주인집마저 아무도 없어 거실 TV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덩그러니 잠을 자거나, 낡고 낡은 종이 위로 그림을 그리거나 하며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나마 아버지가 집에 머무는 며칠동안만큼은 남자는 덜 외로웠지만 아버지는 그 며칠 마저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잠만 잤다. 아버지는 엄마가 일을 나가고 난 빈집으로 종종 낯선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같이 이불을 뒤집어 썼었다. 남자는 벽에 기대어 다리를 모으고 두 손으로 모으고 앉은 채, 들썩이는 이불의 움직임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낯선 여자가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가면 아버지는 그때 유일하게 남자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으로 가까이 가져가 ‘쉿’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남자는 말을 이해하기에 아직 어렸지만 아버지의 저 행동만큼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 하지만 남자가 보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아버지가 계절처럼 집을 떠나면 어머니는 쉬는 날 내내 이불을 빨았다. 깔았던 것, 덮었던 것 모두다 벅벅 손으로 빨며 엄마는 아버지를 그렇게 욕했다. 온 세상 동물의 새끼들을 하나씩 나열하며 엄마는 이불을 빨았다. 하나뿐인 이불을 그렇게 빨고 나면 어머니는 남자를 끌어안고 밤새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남자는 가끔 오는 아버지가 무섭고, 아버지와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낯선 여자가 싫었고, 이상한 소리와 냄새로 가득차는 방이 괴로웠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왔다가 떠나면 어머니가 이렇게 자신을 끌어안고 잠들기에, 어머니의 젖가슴살에 얼굴을 파묻고 잠드는 것이 좋았다. 어머니의 살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남자가 제법 크고 나서 남자의 어머니는 더이상 문을 잠그고 나가지 않았다. 남자가 주인집 물건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몇번이나 한 끝에 얻어낸 자유였기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집 앞 골목길에 앉아서 하루종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거나 콘크리트 사이로 겨우 고개를 내민 잡초들을 밟아버리는 것이 남자의 즐거움이었다. 남자는 동네를 뛰어다니는 또래의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이들은 몇 번 남자에게 같이 놀 것을 제안했지만 남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노는 방법을 몰랐다. 남자는 항상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고 아이들이 뛰어 놀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집주인 아들은 남자를 놀이의 술래만 시켰고 아이들의 놀이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남자는 매번 술래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했다. 결국 아이들은 더이상 남자를 껴주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집 앞 골목길에 앉아 잡초들을 밟기 시작했다.
“꿈에서 전 아이들과 놀고 있었어요. 아이들은 모두 5살 정도였는데 저는 지금 모습 그대로 였어요. 모두들 온동네를 뛰어 놀고 있었어요. 그 동네 한가운데는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모두들 그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놀았죠. 저는 술래가 되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있었고 제 등 뒤로는 아이들이 모두 얼음이 되어 서 있었죠.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놀이였는데 꿈에선 놀이 방법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더군요. 제빠르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면 얼음이었던 아이들은 그새를 못참고 움직이게 되었고 저는 그 놀이의 선수라도 되듯 움직인 아이들을 모두 잡아낼 수가 있었죠. 모두들 제가 계속 술래 하기를 원했어요. 제가 술래를 하면 놀이가 너무나 재밌다는 듯이. 그 때 한 아이가 말했어요. 어느 골목으로 탐험을 가자고. 모두들 그 아이를 따라서 동네 아이들만이 아는 집 사이사이 지름길을 기고 넘으며 뛰기 시작했죠. 신기하게도 이 몸으로 아이들이 다니는 그 길들을 모두 쫓아갈 수가 있었어요. 어느 담장을 넘고, 벽 사이의 개구멍을 지나서 그렇게 마구 뛰기 시작했죠.”
남자는 노인이 건내준 차를 마셨다. 그는 차 보다는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니 차 맛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게다가 가게의 모양새를 보니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보였다). 만약 그의 비서가 차를 건낸 것이었다면 노발대발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에는 그의 비서가 없었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소개한 오래된 밥솥같은 노인만 있었을 뿐이었다. 노인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반대로 남자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자신을 어려운 사람으로 여기고 불편하게 느끼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희열을 느꼈다. 한 때,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사과를 해야만 했던 가수도 있었다. 가수는 몇 년 후 곡을 잘만나서 운좋게 인기의 물살에 몸을 던지기는 했지만 남자에게 그 가수는 여전히 자기 앞에서 무릎을 끓고 용서를 빌던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젊은 나이에 탁월한 수완과 능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라 높은 연봉을 받으며, 팬이라며 사람들이 난리를 치는 유명 가수나 배우들에게 90도 인사를 받고 사는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 앞에서만큼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저 꿈 이야기를 하러 온 평범한 사람.
“아이들은 모두 골목 사이를 다람쥐처럼 누비며 뛰어가기 시작했죠. 아이들을 뒤쫓다보니 숨이 무척 찼습니다. 드디어 아이들이 모두 멈춰선 그 골목에 다다랐을 땐 허파가 터질 것만 같았죠. 숨을 고르며 아이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골목을 보니 그 골목은 정말 좁은 골목이더군요. 아이들의 어깨 양쪽이 모두 골목에 닿을만큼 좁은 골목이었고, 성인 남자는 옆으로 걸어가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어요.”
남자는 다시 차를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구두를 보았다. 구두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골목길에 차를 세울 수가 없어서 근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왔는데 (발렛도 없는 동네 같으니) 아마도 오는 길에 흙을 밟은 것 같았다. 남자는 속으로 비서를 시켜 구두를 깨끗히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태리에서 수입해온 수제 구두에 이런 흙이 묻어 있다니, 구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차례 차례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갔어요. 한 아이가 들어가서 반대쪽 골목으로 빠져나온 후 신호를 주면 그 다음 아이가 들어가는 방식이었죠. 그 좁은 골목에는 비밀이 있었어요. 골목 사이를 겨우겨우 지나가다 골목의 중간즘 들어서면 골목의 좌측 벽으로 어른이 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비밀. 어떤 아이는 의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며 좋아했고 어떤 아이는 선생님이 된 자신을 보았다며 자랑했죠. 마지막 아이가 신호를 주었고 제 차례가 되었어요. 성인의 몸을 하고 있던 저는 아이들처럼 지나갈 수가 없어서 얼굴을 좌측 벽쪽으로 마주하고 옆으로 걸어들어갔어요. 시멘트 벽이 어깨를 스치며 가루들이 어깨와 등에 묻기 시작했죠.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적었어요. 방금까지 대낮이었는데 갑자기 밤이 된 것 처럼 그 곳은 아주 그늘졌고, 여기저기 이끼가 껴있었어요. 한참을 가도 골목의 끝은 보이지가 않았어요. 아니 마치 골목은 점점 더 좁아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어요. 옆으로 게걸음처럼 발을 옮기는데 점점 발을 모두 펴고 있기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폐쇄공포증같은 것이 제 머릿속을 뒤덮기 시작하는 기분이었죠. 그냥 되돌아 갈까 싶어 들어온 쪽을 바라보니 저기도 만만치 않게 멀더군요. 다시 반대편을 바라보니 차라리 반대편이 더 가까운 것 같았어요. 아이들은 반대편에 모두 모여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저를 두고 떠날까봐 두려웠어요. 그때 마주한 벽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벽에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노인도 남자를 재촉하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곤 꿈에서 깨어났어요.”
“비슷한 꿈을 자주 꾸신다고요.”
“네. 동네도 아이들도 없지만 결국 좁은 골목이 나타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고요.”
“네,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곤 꿈에서 깨어나는 건가요.”
“네, 매번 실루엣까지만 보고 깨어납니다.”
노인은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그게 끝인가요?”
남자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느 깊은 산에서 막 내려온 듯한 노인의 표정과 눈을 보니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어서 다 말하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더이상의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문을 열어버렸다. 남자는 빗장을 걸고 두번 세번 자물쇠를 잠그고 또 다른 벽 뒤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사실 남자는 실루엣만 본 것이 아니었다. 마주한 벽에서 그는 분명히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 벽에는 벌거벗은 남자가 서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은 채, 그가 즐겨 입는 유명 브랜드의 양복도, 이태리에서 수입한 구두도 신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매번 꿈에서 깰 때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은 헬스로 다져진 근육들은 모두 사라지고 빼빼 마르고 볼품 없었다. 마치 사면이 모두 막힌 그 방 안에서 한번도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자란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는 기분이 몹시 나빠서 하루종일 짜증이 나있었다. 그러나 꿈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몇 달에 걸쳐서 남자에게 다시 찾아왔다. 모든 것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그였지만 꿈 만큼은 영역밖의 일이었다. 꿈에게 돈을 얼마 쥐어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무서운 얼굴로 협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잊을만 하면 그는 꿈속에서 볼품없이 벌거벗은 한 남자를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부터인가 남자는 점점 그 꿈에 익숙해져갔다. 꿈속에서 남자는 벌거벗은 자신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벽에 서서 벌거벗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은 무척 슬퍼보였다.
“벌거벗고 있더군요.”
남자는 노인에게 말했다.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연예기획사 이사도 아니고 벽에 나타난 제 모습은 그저 벌거벗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어 주었다.
남자는 처음보는 이 노인 앞에서 벽 속의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처럼 모든 옷을 벗고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값비싼 양복을 아꼈지만 양복은 그의 어깨와 등을 항상 불편하게 만들었고 자리에 앉으면 사타구니 쪽이 양복 바지에 꼈다. 대기업 회장들이 즐겨 찾는다는 장인에게 찾아가서 직접 수치를 재고 맞춘 양복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양복이 몹시 불편했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혼자 살기엔 불편한 집, 쓸데없이 기름만 많이 먹는 불편한 차, 비싸지만 불편한 옷, 소화도 잘 안되는 불편한 음식. 하지만 남자에게 불편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남자의 가치를 대변해주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그의 성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의 말에 복종하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자신의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을 둘러싼 값비싼 재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노인 앞에서 그 불편한 모든 것들을 벗어던진 채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노인에게 꿈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꿈을 꾸며 겪었던 괴로움과 잡념까지 모두 노인에게 건네 준 것만 같았다.
노인은 말이 없었다. 더이상의 질문도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침묵은 따뜻했다. 어느 것도 묻지 않는 노인의 침묵에서 남자는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노인은 조용히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첫번째 서랍 안, 세 개의 봉투 중 가자 왼쪽의 것을 꺼냈다. 노인은 다시 소파로 걸어가 남자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남자는 어색하게 봉투를 건네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마치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듯 건방지게 앉아있던 그 남자는 사라지고 어린 소년이 흙묻은 손으로 봉투를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는 일어섰다. 노인에게 악수를 건넸고 노인은 손을 맞잡고 악수하며 말했다.
“한번 안아줘보세요.”
“네?”
남자는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노인은 인자한 미소로 남자에게 다시 말했다.
“그 벽 속의 남자를 한번 안아줘보세요. 다시 그 꿈을 또 꾼다면.”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남자의 손을 마주 잡은 노인의 손은 따뜻했다. 악수한 손을 놓고는 남자는 갈색 문을 열고 나갔다. 문 밖에 나서니 늦가을 바람이 남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도시의 공기는 여느때처럼 무거웠지만 남자는 정말 오랜만에 집 밖에 나온 사람 처럼 도시의 공기를 크게 몰아 쉬었다. 남자의 등 뒤로 늦가을 바람이 천천히 남자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