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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Lu Jan 06. 2019

매몽점 #8 : 지금이라도

당신의 꿈을 삽니다.

#7

남자는 ‘어부’라는 이름이 좋았다. 고기 잡을 어(漁), 지아비 부(夫). 어부. 어부라는 이름에서 나는 바다 냄새가 좋았고, 어부라는 이름에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가 좋았다. 어부라는 이름에서 풍겨지는 거친 사내 냄새가 부러웠고, 어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닷물과 땀이 엉켜 완성된 끈적한 느낌이 탐났다. 


남자는 ‘어부’라는 단어도 좋았다. 받침이 하나도 없어 입을 오므려 벌렸다 모으며 바람을 불어 뱉으면 소리로 완성되는 ‘어부’라는 단어에는 단어 자체에서부터 바닷가 바람을 담고 있었다. 단어 자체로도 꾸밈이 없었고 몸집이라도 커 보이려고 힘겹게 뻗은 가지가 없었다. 굵은 몸통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체만으로 힘이 있는 단어였다. 


남자는 평생 바다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물이라고는 남자가 태어난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줄기가 전부였고, 남자가 태어난 집 수도관은 낡고 말라 ‘콸콸콸’이라는 제대로 된 물소리 한번 내지르지 못하는 연약한 물길이었다. 제대로 된 파도를 맞아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제대로 바다를 곁에 두고 온 몸으로 싸워본 적이 없어서였는지 남자는 ‘어부’라는 이름에 제멋대의 동경을 갖고 있었다. 현실 속 어부의 삶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술에 취하면 말버릇처럼 던지는 말이 있었다.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바다 한번 가로질러봐야 남자의 인생이지.’ 남자의 술 동무 들은 남자의 입에서 ‘고추 달고’라는 말만 나와도 이구동성으로 ‘남자의 인생이지’를 따라 불렀다. 남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것은 이제 남자를 택시에 태워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새끼들이 입 벌리고 자고 있는 집으로 보낼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노인은 갈색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자를 소파로 안내했다. 어부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남자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며 주춤거리다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로 앉았다.


“차 한잔 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노인은 물병에 담긴 물을 컵에 따르고 그 위로 녹차 티백을 올렸다.


“꿈 이야기는 생각나는 데로 들려주시면 됩니다. 말이 가는 대로 단어가 떠오르는 대로 표현해주셔도 좋고요. 설명이 어려운 부분에서는 여기 메모장에 그림으로 표현해주셔도 좋습니다. 그럼 편하실 때 시작하시지요.”


남자의 입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녹차는 차갑지는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남자의 사무실에 있는 녹차와 같은 회사의 티백인데 맛이 참 다르구나 싶었다. 사무실의 녹차는 썼고 이 곳의 녹차는 달았다. 


“꿈속에서 저는 인적이 없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어요. 분명 대낮이었는데 구름이 져서 그런지 해가 들지 않아 어둡다는 생각을 했어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여름날 있잖아요. 꿈에서 저는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목적지를 가지고 걸어가고 있었어요. 논길 끝에 있는 어느 집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는데, 무척 익숙한 길처럼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발에 자꾸만 돌이 들어와서 발을 보니, 짚신을 신고 있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황당하지만, 꿈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발을 툭툭 털어 짚신에 들어온 돌을 털고는 다시 걸어갔죠. 그때 웬 아이가 뛰어와서 저에게 말을 걸었어요.


'아저씨, 어디 가요?'

'저기 길 끝에 집에 간단다.'

'거기를 왜 가요?'


마치 영화가 잠깐 멈춘 것처럼 꿈에서 저는 멈춰버렸어요. 어라, 왜 거기를 가는 거지?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빠졌죠.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왜 저기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면서 말이죠.


'아저씨, 저기 가면 안돼요'


꿈속에서 아이는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제게 말했어요. 가만 보니 아이가 낯이 익더라고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에 옷차림도 그렇고 말이죠.


'너 나를 아니?'


제가 아이에게 물어봤어요.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입을 삐죽거리더니 저를 등지고 뛰어가기 시작하더군요. 훌쩍 뛰어서 논밭으로 내려간 아이는 다시 뒤를 돌아보고 말했어요.


'아저씨, 저기 가면 안돼요. 저기 가면 후회할 거예요.'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아이는 제 등 뒤로 뛰어가버렸어요.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한참을 누군지 기억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체념하려던 순간 그 아이 멀리 바다가 보이더군요. 수평선이 하얗게 늘어져서, 파도 위로는 햇살이 잔뜩 부서지는 듯했어요. 어둡고 축축한 논길과는 정반대로,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물에 빠져들고 싶은 그런 바다 말이에요. 숨이 확 트이는 그런 풍경이었죠."


남자는 난생처음 보는 노인 앞에서 꿈의 기억을 더듬거리다 보니, 어느새 그 바다를 마주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더, 바다의 냄새를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싶은 듯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내쉬었다. 현실에서의 냄새는 싸구려 소파에서 나는 오래된 가죽 냄새뿐이었지만,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행위 만으로도 무언가 남자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꿈에서 저는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끝이 없는 논길은 계속 이어졌고, 길 끝에 놓여있는 집은 닿을 듯, 닿지 않는 듯 그렇게 계속 한참을 걸어 가까워진 듯하면 다시 멀어지고 또다시 멀어지고 그렇게 손에 닿지 않더군요. 그러던 순간, 점점 논길을 덮고 있는 진흙이 질척 질척이더니 한발 한발 떼는 것이 힘들어지더군요. 겨우 한 발을 떼어 내딛으면, 그다음 발이 빠지지 않아 한참을 고생했어요. 짚신 사이의 발가락으로 진흙이 점점 들어오고 들어오더니, 어느 순간 무릎까지 진흙이 차올랐어요. 거의 갯벌에 빠진 수준으로 말이죠. 그러더니... 더 이상 발이 빠지지 않았어요. 진흙은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더 이상 발을 뺄 수가 없었죠. 온 힘으로 발을 빼내려던 순간, '으아악!' 이런 소리를 내며 꿈에서 깨어났어요. 발을 어찌나 뻥 찼는지, 이불이 방구석으로 날아가 있더군요. 하하하..."


노인에게 그 순간을 보여주고 싶은 듯, 남자는 발을 쭉 펴 올렸다. 허탈한듯한 남자의 웃음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술자리에서 꿈을 산다는 가게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돈을 받을 만한 꿈이 있다면서 의기양양하게 가게를 찾은 것에 비해, 막상 입으로 꿈을 이야기하다 보니 조금 허무한가 싶어 져 남자는 이내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말을 하다 보니, 내가 왜 꿈에서 그러고 있었는지 싶기도 하고 개꿈이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내가 뭐 하는 거지 싶기도 한 기분이었다.


"사실 꿈에서 왜 그랬는지 잘 이해가 안 가요. 쓸데없이 그 길을 걷는 꿈을 왜 꾼지도 모르겠고, 무슨 의미가 있는 꿈인가 몇 번이고 생각해봤지만, 그냥 찝찝한 그런 느낌만 남더라고요. 꿈에서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정반대인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꿈은 이미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는 그런 연극과도 같아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그 아이를 따라서 바다를 향하면 좋을 것을 저는 계속 그 논길을 걸어갔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정해진 힘에 의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지는 거죠. 그리고 그 무엇에도 의심을 갖지 않아요. 꿈은 그냥 그렇게 내 의지이지만, 내 의지가 아닌, 마치 팔다리에 줄이 매여진 꼭두각시 인형같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건가 봐요."


"현실은 다른가요?"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듣기만 하던 노인이 말했다. 


"하.. 현실도 뭐 별반 다르진 않네요."


노인의 말에 남자는 목구멍 끝에서 씁쓸함을 느꼈다. 그렇지, 꿈이나 현실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문제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저 줄에 의해 팔다리를 흔드는 꼭두각시 마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남자 스스로도 노인의 질문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네..?"


남자는 노인이 자신을 조롱하는 건가 싶었다.


"꿈은 깨고 나면 다시 그 꿈으로 돌아가서 그 상황을 바꿀 수가 없죠.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아지랑이를 잡은 손처럼 모두 사라지고 마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죠. 현실에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나를 조종하는 팔다리의 줄을 끊어버리고 반대의 길로 걸어갈 수 있죠. 언제든지 내 의지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많은 분들이 제 가게로 찾아와 꿈에서는 가능한 일인데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해하시더군요. 하지만 손님은 꿈에서는 못해냈지만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지금이라도'라는 선택권을 갖고 계시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남자는 노인의 말에 잠시 시간이 멈춰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노인이 건네는 봉투를 받으며, 남자는 약간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꿈이 뭐라고, 이 노인은 돈을 지불하는 것일까. 누구든 이 가게로 찾아와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여도 돈까지 받고 가게를 나갈 수 있다는 것일까?


"아, 생각났어요."

"무엇이요?"

"꿈에서 그 남자아이요."

"아, 그 남자아이."

"네, 하... 고향집에 있는 앨범에서 보았던 남자아이였어요."

"아는 분이었나요?"

"음, 네. 잘~ 아는 분이죠."


남자는 노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갈색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꿈속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입을 삐쭉거리던 그 아이는, 고향집 앨범 속에서 보았던 국민학교 시절의 남자 자신이었다. 맨발로 바닷가를 향해 등을 곧게 세우고 달려가던 그 아이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지금이라도'라... 어디 한번 배를 타고 그 섬을 찾아 떠나볼까. 지금이라도~"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더니,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래, 지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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