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아침부터 온통 정신이 없었다.
아이의 건강검진을 예약해 놓은 병원에 급히 가려는데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주길 바라며 시동을 몇 번 더 걸어봤지만, 탈탈탈탈탈- 힘없이 무너지는 소리에 "이 놈의 똥차"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잖아도 성격 급한 난데,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이마의 미간이 좁혀지고,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여차저차 오전 스케줄은 무사히 완료했으나 마음도 몸도 에너지 소진으로 이미 지쳐버렸다.
급속 배터리 충전을 하고선 차량 운행을 좀 해야 했기에 동네를 돌다 치킨을 사가기로 마음먹었다.
구름은 왜 이렇게 내려앉아있는지,
꾸물럭 대는 하늘에 어지럼증이 잠깐 일었다.
이런 날엔 낮잠이 필수지, 치킨을 먹은 후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꿈나라로 향할 행복한 계획까지 야무지게 짰다.
그리고는 좁은 골목 주차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려던 참에 사달이 났다.
쿵! 우지끈-
차가 차를 받는 소리는 소름 돋게 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차에 꽂혔다. 벼락같은 쿵 소리에 이어 철판이 힘없이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차를 앞으로 바짝 빼고 후진을 한다는 게, 상상 속에서 기어를 바꾼 것일까. 기어는 D에 두고 엑셀을 힘 있게 밟았다. 그렇게 앞에 주차된 차를 저항 없이 들이받아버렸다.
순간 꿈일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아니면 턱이 높아 차에 가해진 충격이 사고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바람인지 기도인지 모를 것들이 마음의 소리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 착각들이 차 뒤쪽에서 나타난,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차주의 표정으로 인해 이미 난 가해자가 되어있음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사실 처음이 아니다. 주차되어 있는 차를 긁고 지나가 타인의 재물에 손괴를 입혔던 경험들이(ㅠㅠ). 그런데도 항상 사고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
이럴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사람, 떨리는 손으로 남편 번호를 눌렀다.
-여보, 나 또 사고 쳤어…
-응?
-차 사고 났어… 주차된 차를…ㅠㅠ
-다친 사람은 없고?
-응 근데 좀 세게 박았어..
-그래.
-내가 박았다니까. 본넷도 들리고, 범퍼랑 라이트 있는데도 내려앉았어…
-그래. 상대방 만나서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 물어보고, 보험 접수하자.
난 거의 울다시피 현재 눈앞의 상황을 전달했다.
전적이 화려했기에 한 번쯤은 나를 탓하더라도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 있으려 했다. 하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편은 늘 지나치게 차분하다.
평소의 나는 성격이 워낙 급해 당황하면 더욱 일을 그르치는 데 반해 남편은 가끔은 답답하리만치 느긋하다.
게다가 난 걱정거리가 생기면 열 일 제쳐두고 그 걱정에 근심이 더해져 온 정신을 지배하는 반면, 남편은 모든 일은 애초에 정해놓은 우선순위가 있고, 걱정거리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불과 며칠 전에도 남편의 회사에서 개인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 벌써 나는 본인보다도 먼저 걱정보따리를 풀어헤치고 한 숨을 푹푹 내쉬고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뒤로 금요일이니 애들 데리고 치킨 먹으러 가자는 남편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었다.
보험사 직원이 와서 사고경위를 묻고, 피해차주와 함께 사고차량을 살펴보는데, 난 그 뒤에서 죄스러운 마음에 한없이 쭈구리가 되어 서있었다.
그때 남편이 도착했고, 와서는 쭈그러진 내 등을 토닥거렸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 잘 처리될 거야. 어깨 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남편이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고 한바탕 핀잔을 주었다면, 사실 나도 못 참고 “그럴 수도 있지! 실수였어!“ 라고 받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동시에 자괴감의 바다에서 한동안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남편의 무심한 듯 차분한 태도가 오히려 일상으로의 빠른 회복을 앞당겼다. 동굴을 파고 들어가 의기소침해 있었을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오후엔 아이들과 공원에서 신나게 뛰어놀았으니까.
각자 다른 행성에서 건너온 남녀가 지구에서 만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제각기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고선 참 많이도 투닥거린다.
오래전에 봤던 그 책,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참 많이 다른 우리가,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