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3분경, 대한민국에는 가슴 아픈 제주항공기 활주로 이탈사고가 있었다. 179명이라는 사망자가 나왔다. 수많은 언론과 유튜브, 숏츠 SNS이 이것을 보도하고 원인부터 대안, 개인의 사연까지 지금까지 뉴스의 1면을 할애한다. 10년 전 세월호의 참사로 노란 리본의 기억을 간직한 채 또 다른 슬픔을 가슴에 묻고 있다.
망자의 깊은 애도와 명복을 빈다.
이러한 국가애도기간에도 씁쓸함과 분노를 본다. 보험금이 사상최대라는 둥, 한 사람에게 얼마씩 지불된다는 가십으로 세월호 참사때와 같이 남은 자들을 살인하고 있다. 사람의 존재가치마저 숫자로 생각하는 사람들. 돈이라도 많이 받아서 좋겠다는 미친 개소리들. 가족이 죽었으니 누가 상속 1순위인가라는 가슴통탄하고 분개할 말들을 댓글이 막히니 SNS를 통하여 유희거리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분통 터진다. 망자 앞에서 그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이를 통해 얻는 자극적인 검색어 순위 경쟁을 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사람의 존재이유가 돈과 같아진 걸까? 인간의 가치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그럼에도 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나에게는 있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잘한다. 미끌미끌한 쇠젓가락으로 묵을 집고, 머리카락을 골라낼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선천적, 후천적으로 장애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닌다. 처음부터 잘 걸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일어나서 뒤뚱뒤뚱. 수천, 수만 번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걷고, 뛸 수 있는 경지까지 우리는 도달했다. 어렸을 때 쇠젓가락질을 하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실패와 밥흘림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누군가는 계속 고쳐주고, 다시 시도하고, 꾸짖지 않고, 참아주고, 기다려준 위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나를 아는 사람들. 나와 관계한 모든 사건과 이해들. 나를 참고, 나를 소망으로 기다려준 것이 이것뿐이겠는가? 지금 '나'라는 존재는 이런 위대한 것들의 기다림과 인내의 결과이다. 어떤 존재라는 것이 - 살아있는 자이든 죽은 자이든- 많은 땀과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이기에 나는 이 모든 것들에게 빚진 자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반드시 '살아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같진 않다. 망자도 죽은 자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자들에게 빚진 자이며, 죽은 자도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얼마든지 다시 살아나는 존재이다.
나의 죽음이 오기까지는 어떻게든 유명을 달리한 존재의 빚진 자로서 삶을 마저 살아내야만 한다. 지금, 먼저 죽은 자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자가 그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는 유일한 끈, 먼저 죽은 빚쟁이의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독촉장을 깨달았다. 따라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고 거기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