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소환

by 김세환

지난 11월, 친구인 G의 전화를 받았다. 12월 21일 친구들 모임이 강화 석모도에서 있는데, 수년간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가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나도 더 이상의 변명을 할 수 없어서 부담감을 안고 약속했다. G의 친구들은 나를 모두 안다. 군대 후임이었던 G가 나에 대해서 30년간 그들에게 말해왔고, 나도 그 친구들의 모든 이름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또 하나의 인연과 친구를 만든다는 것이 10대만큼 쉽지 않음을 우린 충분히 학습했다. 굴착기 영업을 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사회에서의 만남은 한계가 있었다. 나의 부담은 초등학교부터 알아온 G의 친구들과 G와 군시절 후임으로부터 이어져 온 괴리의 시간과 공감이었다.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그들과의 만남,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G와 함께 제주도에서 만났던 L이 있다는 위안이었다.

오후 2시, 수원에서 '숲속바다풍경 펜션'을 입력하고 가는 중에도 몇 번씩 G는 나를 확인했다. 잠시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으로 G가 들려준 그들의 이미지를 확인하고, 지금쯤 대명항에서 찬거리를 준비하는 그들의 손놀림과 초등시절 그들의 추억거리로 기뻐하며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이방인의 준비를 했다. 나의 도착을 알리자 모두 뛰어나왔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였다. 지금까지 그들은 나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음을 그들의 반김으로 직감했다. 2년 만에 만나 제주도 사는 L은 '오랜만이다.'라고 나에게 안부를 전했다. C는 '너네 학교 분식점에서 그때 아마도 라면이 300원이었지. 김치와 계란을 풀어주면 500원이었고'하며 내가 기억 못 하는 인사를 건넸다. S와 Y는 처음이라 낯선 목례로 악수를 했다. S는 KFC치킨 할아버지의 흰 수염처럼 매력적이고 포근한 인상이었다. 옷도 흰옷을 입고 왔다. Y는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피는 신중함이 있었다. 준비된 상에는 대명항의 모든 해산물로 싱싱했고, 나의 늦음으로 상추와 깻잎은 풀이 죽었다.

몇 마디 주고받음으로 우리의 어색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급속히 친밀해졌다. 우리에게는 1987년 6월의 닫힌 창문 틈사이로 스며든 최루탄으로 후덥지고 매쾌한 공기 속에서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대입을 준비해야 했던 무더운 여름날의 기억이 있었다. 1979년 12월 계엄령으로 서울까지 진격한 탱크가 종로, 광화문, 각 대학교에 배치된 것을 봤었고 어떤 호기심 많은 친구는 그것이 신기해 거기에 올라타다 혼났던 증인이었다. 공무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밤에 가정집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감시했던 기억, 늦은 저녁 회사 회식을 마치고 12시를 넘겨 야간 통행금지로 파출소에서 새벽 4시를 기다려야 하는 아버지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5시에 집으로 오자마자 출근해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던 어머니들이 있었다. 소피 마르소와 피비 캐치, 브룩 쉴즈, 쥴리아 로버츠의 책받침을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고, 실베스터 스탤론, 톰 행크스와 브루스 윌리스의 30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채널이 3개밖에 없던 시절, 여자친구와 약속을 하려면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 다른 사람이 받으면 바로 끊어야 했던 순진함, 콜라보다 맥콜을 더 좋아했던 우리. 마이마이에서 CD 플레이어를 잇는 MP3는 우리에게 혁명이었다. 누구나 삐삐를 지금의 핸드폰만큼 허리에 차고 다녔고, 486 팬티엄 컴퓨터에 책이 몇 권들어가냐고 내기를 했던 기억도 있었다. 대학교 교정에는 매일 쏴대는 최루탄의 가루가 나무에 걸려, 잔잔한 바람 속 그 아래를 지날 때면 콜록임을 피할 수 없었다. 10대 때 같은 놀이를 하며 친해졌던 그들은 이 기억들의 공유로 나를 그들의 무리로 스며들게 했다.

그렇게 우린 50 중반을 넘기며 서로의 주름과 흰머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로 깊이 파인 주름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털어 넣는 친구들. C는 느지막하게 결혼을 하면서 '47살 나이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었고 잠을 설쳤다'라고 수줍어했다. 금년 6월에 재혼한 L은 '아내를 위해서라도 난 건강해야 해.'라며 머리를 긁었다. 5년 전 아내와 사별한 G는 그런 친구들의 고백에 쓸쓸해했으며 그 모든 과정에 나는 있었기에 그의 처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린 마음껏 그리워했고, 겁 없던 청춘들이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남은 날을 바라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는 푸르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_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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