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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Oct 02. 2020

Homo Avoidancus [회피하는 인간]

어쨌든, 감사일기의 시작

막상 붙잡고 들어 보면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 인생의 한 두 가지쯤은 굴곡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일이 지독하게 꼬이고 꼬여 쉽게 풀린 적이 없었고,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가장 버거운 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이었다. 이쯤 되면 지인들도 사주팔자에 ’ 살’이 잔뜩 낀 것 같다고 이야기할 만큼 남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자주, 오래 만났다. 정말 쉬이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곳에 도전해왔지만, 어느 곳에 가든 어벤저스급 성격장애자들이 속한-주로 걸출한 불란의 아이콘들이 속출하는-집단에 배정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모든 것을 내 탓이라 여겼다. 사회성이 부족한 내 탓, 일머리가 모자란 내 탓, 변화하는 환경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내 탓, 문제를 회피하고 마는 내 탓 등등.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안으로 안으로 끝도 없이 곪아갔었다. 덕분에 지난 10년간 추적 60분과 아침 드라마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면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동반한 뿌리 깊은 트라우마뿐이었다. 심지어 증세가 나아지기는커녕 6~7년 간의 (아름다운 20대, 나의 청춘이여!) 기억마저 듬성듬성 남기고 죄다 잊어버렸으니 여러모로 참담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여전히 스냅사진 같은 단편적인 기억들만 간간히 떠오를 뿐이고,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이다. 아직 기억 저 편으로 보내버린 과거의 시간과 기억들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좀 더 자신 있게 말하면 좋겠지만, 정확히 무엇을 극복했으며 언제부터,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과거에 비해 지금의 내 상태가 많이 좋아졌단 생각이 든다. 어차피 트라우마는 내 머리와 마음속에 깊게 새겨진 각인 같은 것이어서 온전히 흔적 없이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저 불가항력적으로 내가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대비책을 세워두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다만 확실한 것은 3년이란 시간에 걸쳐 꾸준히 나의 트라우마들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노력과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준 것 중 하나가 감사일기를 써보는 것이었다. 나를 담당하는 의사 선생님이 내준 숙제였는데, 매일 써야 한다거나 한 번에 몇 가지를 써야 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감사했던 일을 적으면 충분했다.

막상 일기장을 펴고 연필로 무엇이든 감사한 내용을 써보려고 하면, 오글거리는 기분과 함께 왠지 모를 반감만 솟구쳤다. 이미 충분히 엉망진창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데, 대체 내가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 건지 억울하기만 했다. 난 지난 삶 동안 무언가를 쥐어보기보단 끊임없이 잃어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들, 특히 힘겹고 버겁기만 했던 일들을 불쑥불쑥 떠올렸다. 이를테면, 어떤 기간에 대해서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약물의 부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못했을 때, 나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웠을 때와 같은 일들과 그때의 감정들 말이다.


복잡미묘한 나의 감정과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담당의는 이미 놓쳐버린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지금의 내가 감사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고민해보고 기록해 보면 좋겠다고 권했다. 그 뒤, 기억의 진위나 시간의 선후 관계와 상관없이 떠오를 때마다 하나씩 기록해 나갔다.


그것이 ‘어쨌든, 감사일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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