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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Nov 06. 2020

Homo Avoidancus (회피하는 인간)

아직 미니멀 라이프는 무리입니다만

내 방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과 머릿속에 닿아 있다. 요 몇 년 간 나의 좁은 방에는-지인들은 믿지 않겠지만 굉장히 나만의 질서에 따라 놓인-많은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배열이 있다는 게 좋았고, 오히려 더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일 때 마음이 편안했다. 아마도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했었나 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에 관해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조각들이 타인에게 보이는 것을 꺼렸던 것 같다. 한 때는 자신감이 없고 나 자신이 싫어서, 한 때는 내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를 감추기 위해 어지러이 쌓아둔 물건들이 되려 나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듯,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손이 닿는 것에는 그 사람이 묻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오랜 무기력이나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들의 수기를 보면 청소를 통해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글들이 제법 많다. ‘오랫동안 내가 싫었습니다’의 저자 오카 에리도 주변에 있는 페트병을 10초 동안 치우는 작은 행동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최근 들어 나 역시 아주 조금씩, 그것이 비록 나무늘보의 속도일지라도 생각날 때마다, 하고 싶은 만큼만 조금씩 정리를 시작했다. 내 주변은 지인들이 눈곱만큼도, 전혀,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정리되고 변화하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몇 장 쓰지 않은 노트를 한 권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어둡고 긴 터널만이 있을 뿐, 어떠한 형체도, 냄새도, 소리도 없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공허함과 상실감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분명 나는 실재했었음에도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내 탓이다. 무엇이든 남기지 않으려고, 지워버리려고 애쓴 내 탓이다. 또렷하진 않아도 누군가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좋은 향기도, 따스하게 안아주던 온기도 있었다. 다만 아주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흐릿한 기억일 뿐이다. 그것은 깜깜한 영화관에서 찰나의 순간 떠올랐다 사라지는 영상들처럼 보였다. 그저 점멸등처럼 여운만 남긴 채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내가 쓴 기억은 전혀 없다. 그저 내 노트에, 내 글씨체로 2015년의 기록이라고 적혀있을 뿐이다. 그때도 나 자신에 대한 낯섦과 혼란스러움 때문에 막막했던 순간이었나 보다. 정말 한 치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 속에 나 홀로 서 있는 기분으로 글을 써 내려간 것 같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이것 또한 본인에 대한 반감이 만들어 낸 촌극인 양 써놓았다는 점이다. 무언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트라우마 때문인데, 어김없이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항상 내 탓을 하고, 내 잘못이라 여기는 것이 편하고 익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일기장에서 조차 헝클어진 감정들을 행간 사이에 숨겨 놓았다. 그 속에는 따뜻하고 좋은 기억들이 담긴 찰나의 순간들을 놓쳐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속상하고 서글픈 마음마저 쉬이 표출하지 못하고 그저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을 보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나 자신에게도 얼마나 솔직하지 못했던 걸까. 그나마 이제라도 하나, 둘 꺼내서 확인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간직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확실히 뭔가 심적으로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는 눈 앞에 보이는 공간이나 사물 등을 정리함으로써 발현되나 보다. 그 출발점에 서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더 정리해야 할 것은  방뿐만이 아니다.  머릿 속도, 마음도 청소와 환기가 필요하다.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쌓아두기만 했었던 기억의 조각들 사라져 버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와 연민보다는 비움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가고 싶다.  시간의 끝에   홀가분해지고 편안해진 나를 만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쨌든, 감사일기

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던 책들을 모아 가지런하게 책장에 꽂았다. 여기저기 손 닿는 대로 끄적여 놓았던 노트들 차곡차곡 정리했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밀어 넣었던 건지. 마냥 조그만 방이라도 투덜댔었는데 이제는 대각선으로 누울 수도 있다!! 아직 미니멀 라이프는 무리지만, 나무늘보급 정리라도 멈추지 말아야겠다. 내년 이맘때쯤엔 세로로 누울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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