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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Oct 26. 2020

Homo Avoidancus (회피하는 인간)

INFP 잔다르크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왕지사 나의 기억에 6~7년의 공백이 생긴 김에 내가 원하는 나로 새롭게 써내려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나 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처럼 생각보다 나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회피부터 하고 보고, 생각과 호기심이 많아 산만한 것도 여전했다. 다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줄곧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과 관심의 방향이 나의 바깥을 향해 있는 사람이었다. MBTI 검사 결과 역시 평생 동안, 일관성 있게 열정으로 무장한 ENFP 스파크 형이었다.

머릿속에 싱크홀이 생긴 이후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나의 아픈 과거나 기억 상실에 대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전의 나를 잘 모르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또한 점점 어려워졌다. 원래도 낯가림이 있는 편이었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에 주저한 적은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딱 반대였다.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 세상 가장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 회의적으로 다가오자,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고 삶의 반경을 겹쳐 나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는 슬픔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무심결에 주고받는 말들로 생겨나는 생채기를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이든, 새로운 사람이든 누군가를 만나고 난 뒤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하는 내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처럼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느 모임에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좋은 사람이란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고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한 사람이라 믿었다. 다만 그것이 내심 내성적인 성격보다는 외향적인 성격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어쩐지 내성적이라는 단어에는 소심하고 고독한 느낌을 떠올리고, 외향적이라는 단어에는 밝고 명랑한 느낌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6~7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언가 나에게 극단적인 변화-스스로 판단하기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를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었다. 심지어 성인이 된 이후, 나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확립되는 중요한 시기의 기억들을 놓쳤다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것이 나의 깊은 상처이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다.


어쨌든, 감사일기

치료를 시작하면서 MBTI 검사를 했다. 이번에도-ENFP일 때와 비슷하게 각각의 경향성이 70 퍼센트 이상의 점수를 갖는-극단적인 그래프를 보이며 INFP 잔다르크형이 나왔다. 자꾸만 하고 싶은 말을 바깥으로 내뱉지 못하고, 내 안에 오랫동안 끌어안고 생각하는-사실은 끙끙대는-사람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 또한 근거 없는 선입견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단지 내 내면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사람일 뿐이고, 한 현으로는 잔다르크처럼 신념이 강하고 정의로운 신녀성이 된 것 같아 힘이 난다. 역시 언제나 꿈보다 해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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