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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isie Oct 11. 2020

Homo Avoidancus (회피하는 인간)

조각난 기억들을 마주하는 기분

언제, 어디서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티브이에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온전한 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저 스냅사진 같은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니까. 다만 단순한 건망증 같은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 있었잖아~‘라고 하면 정말 뇌 속이 진공 상태인 것처럼 어떤 단서도 떠오르지 않는 수준이다. 일정한 기간에 대해 내 의지로 어떤 기억을 불러내진 못하고 일방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만 지켜봐야 한다. 저게 내 기억이겠거니 하면서.

그것은 마치 만취 상태로 필름이 끊어진 후 맞이하는 아침 같다. 속은 메스껍고 머리는 깨질 듯한데 뭔가 전날의 기억은 날듯 말 듯 하다. 다른 건 다 밀어 놓고 정작 추하게 꼬장을 부린 부분만이라도 기억이 나면 좋으련만, 하필 그 부분만 깜깜이다. 그때의 그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 그게 바로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감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불완전한 기억들을 가지고, 갑작스레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믿고 받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기억이 텅 빈 시간이 인생의 1/3 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체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만 같은 막막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이토록 나를 궁지로 몰고 간 삶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던 순간들이 대체 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은 걸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 사이의 중요한 연결 고리를 잃어버린 것은 내 시간과 삶을 통째로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어떤 준비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훅 늙어버린(?) 느낌이랄까?! 그것은 결말은 알지만 전개 과정을 꼼꼼히 보지 않으면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난해한 영화처럼 찝찝했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기분.

그나마 영화라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데 이건 내가 걸어온 인생이라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꼭 봐야만 하는데, 기억이 다 휘발되어 되돌려 볼 수도 없다니 뭐 이런 막 돼먹은 상황이 다 있는지. 대체, 왜 나는 이런 선택들을 한 것인지, 어쩌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인지 모든 것이 그저 미지수였다. 분명 답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뿌연 연기와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조각난 장면들 뿐이었다. 젠장.  


어쨌든, 감사일기

언제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위기를 인정하고, 책임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오랜 시간 회피해 왔던 뿌리 깊은 문제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이해가 되진 않지만,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지금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제법 성공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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