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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백 Aug 03. 2018

나이트 크롤러 Nightcrawler , 2014

적나라한 실재, 그에 대한 인식을 위하여





【 감상 후기 - 나이트 크롤러 Nightcrawler , 2014 】


사고 현장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 방송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속칭 '나이트 크롤러'


0. 들어가시기 전에


며칠 전에 영화를 보고 나서 개인적인 기록의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날 것 그대로입니다. 또 '영화에 대한 생각'을 쓴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을 쓴 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다소 파편적이어서 불친절한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명시적인 스포일러는 없지만 혹여 민감하신 분들은 관람 후에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0. 미리 보는 간단 영화 평


일단 영화 평은, 나름 객관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하겠지만,  아무래도 주관성이 배제될 수 없으니 참고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는 많이 평범합니다. 연출은 다행히도 그것보다는 더 좋습니다.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연기는,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캐릭터가 크게 입체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좋았습니다. 평점으로 말하면 5점 만점에 3.6점입니다.



1. 영화의 줄거리('스포일러'가 될 수 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 방송국에 팔아 돈을 버는 속칭 나이트 크롤러(밤에 다니는 지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 블룸'은 시설물이나 구조물 등을 훔쳐 고철 가게에 팔아먹고 사는 좀도둑이다. 첫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다. 또 그는 그 자신의 말처럼 '빨리 배운다.' 무엇을 배우는가가 더 중요한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들에 대해 그는 치밀하게 배운다. 그가 배우는 곳은 인터넷이다. 어떻게 배우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하튼 그는 다소 미숙하지만 자신이 생존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수준으로 배워낸다.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루이스 블룸'


우연히 그는 나이트 크롤러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알게 되고, 자전거를 훔쳐 구입한 작은 캠코더로 그 일을 시작한다. 지역 방송국의 저녁 뉴스 담당자인 니나를 숙주로 삼고 그는 치밀하게 자신의 크기를 키워나간다. 마치 일종의 암세포처럼 말이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그 암세포가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이미 각종 암으로 만연한 이 세상에 또 하나쯤 더해지는 게 무슨 대수냐고 묻는듯한 마지막 장면의 배경음악은 적당히 흥겹다. 마치 이미 부정과 부패에 둔감해져 무관심한 눈으로, '뭐 다 그렇지, 뭐.'라고 그저 냉소만 하는 대중처럼 말이다.




2. 영화에 대한, 아니 영화를 보고 든 단상


현실이라는 핑계 속에 숨어, 꿈을 잃어버린 대중들의 끔찍한 모습이 바로 주인공의 황량한 미소와 닮았다.
당신은 그를 진심으로 비난하는가? 오히려 동경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앞서 언급한 대로 이 글은 영화를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가 다루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보다는,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이 떠올랐는지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서 든 단상을 조금 적어보자면 이렇다.


우선 조금 날것 그대로의 생각이라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가치가 '사람' 보다는 '자본'에, '삶' 보다는 '생존'에, '꿈' 보다는 '현실'에, '생산'보다는 '소비'에, '우리' 보다는 '나'에게 있는 사람들이 이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인 '루 블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 건 가식이거나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높다.


노파심에 첨언을 하지만, 여기서 그런 가치들이 그릇된 것이고 따라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일차원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또 그렇게 단선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행동이 작금의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자신의 선호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관되고 분명한 선호는 혼란한 사회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동안 밤의 지렁이인 루 블룸 얼굴에서 줄곧 비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중'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중이 그와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불편함들이 대중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떤 면에서는 대중보다 낫다.  그는 명확하고, 그래서 예측 가능하니까.


영화 속의 불편하고 불행한 일들은, 절대로, 결여된 정신을 가진 한 개인의 어리석은 악함에 인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의 감상이 루 블룸이라는 한 개인으로 수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매스 미디어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자극적 경쟁 때문에, 인간성 상실이라는 사회문제가 심화가 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만 읽히는 것도 부족하다.


좀 더 근본에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근본을 뿌리 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이라는 무덤에 '이상'이라는 희망을 묻어 버렸기 때문이다. 신을 죽인 건 사람들이라는 니체의 선언처럼 말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니체가 말한 위버맨쉬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일을 바란다는 것'은 한편으로 또 다른 비극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하는 것이고, 희망한다면 '전진'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겪어 봤듯이 말이다. 즉,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실천이다.)


진정한 희망을 품었을 때에야 우리는 '맨'얼굴로 '진정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다. '부정'과 '한계' 그리고 '금지'를 의미하는 현실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우리만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곳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추동하는 사회라면 살아 볼만한 사회가 아닐까. 그런 사회라면 힘이 좀 들더라도 찾아 가 볼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루 블룸의 모습을 통해 비록 고통스럽겠지만, 우리(자신)의 적나라한 실재를 인정함으로써 '정체'로부터 탈피하여 '전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 상념이라도 한 번 정도는 떠올려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 이미지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7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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