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는 여자#10] 엔텔로프 캐년을 다녀와서.

바람과 물과 모래의 작용. 나를 돌아보는 여행

by 꼰대 언니

사막에 때가 되면 찾아오는 큰 비는 모래 틈에 스며들어 물길을 내었다. 물이 비집고 지나간 자리에 생긴 균열은 갖가지 무늬를 그렸다.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에 조금씩 넓어지고 짚어져, 제법 높고 긴 협곡을 이루었다. 태초에 물이 스며들었던 사막의 표면은 불어온 바람에 모래로 덮여 어느새 잊혀 버렸지만, 이 협곡은 수만 년 우리 시선 밖에서 존재해 왔다.


물이 지나간 자리는 때로는 소용돌이 형상으로, 때로는 고드름 마냥, 같은 듯 다른 다채로운 형상을 드러냈다. 건기에 불어오는 드센 바람은 모래를 곱게 갈아 협곡에 흩뿌려, 무늬에 섬세한 변화를 주었다.


태양의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50가지가 넘은 오렌지 색이 그려내는 작품을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며, 가이드를 따라 20분 남짓 걸었을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막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KakaoTalk_20250629_225133401_14.jpg


5월의 미국 서부 여행, 엔텔로프 협곡에서 돌아온 후, 바람과 물과 모래에 대한 상념이 떠나지 않았다. 바람은 수시로 모래를 움직였고, 물은 서서히 그러나 전혀 다른 형질로 모래를 바꾸었다.


언제부턴가 모래처럼 작고 사소한 순간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나는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들이치는 물에 어떻게 반응해 왔을까? 나는 왜 스스로 변화하려 하지 않고, 물과 바람에 나를 내 맡기고만 있었을까?


반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정 바람과 물처럼 누구를 변화시켜 본 적도 없는 하찮은 삶.


그저 쿨한 게 좋다는 가벼운 변명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수많은 결정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렸다. 바람처럼 강하게, 혹은 물처럼 끈기 있게, 어느 곳이든 향하여 가고 있기를 바라 왔지만, 사실은 그저 바깥에 몸을 맡긴 모래의 형상이다.


왜 이리 능동적이 못할까 하는 후회와 지금 잡고 있는 것들이 손 안의 모래처럼 흘러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문득 덮쳐 온다. 작은 다짐조차 쉬어왔던 작금의 생활을 반성하며, 남은 인생 조금씩 변하고 싶다. 나이가 든 후 하는 후회는 무엇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련이 그득하다.


저 넓은 사막을 상대로 저토록 아름다운 협곡을 빚어낸 빗물처럼, 조금씩 느리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일하는 여자#24] 하나의 발언, 엇갈린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