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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 #25] 내가 남미새가 된 이유

Happy Fathers Day!

by 꼰대 언니

나는 시쳇말로 남미새다.


여고를 졸업했고, 여학우 비중이 80%인 영문학도지만, 대학 동아리 공대 후배들과, 딱히 취업준비도 안 하고 시답잖은 보드게임과 주거니 받거니 농담으로 몇 번의 방학들을 낭비하던 그때부터 시작된 걸까.


입사하고 전문비서직이라는 여초 집단에 근거하였으나, 일 년 지나 못 버티고, 해외 영업이라는 남초 조직으로 전배한 후, 줄곧 남성비율 80% 이상의 조직생활을 별 탈없이 즐겨왔다. 학부모 모임, 여고 동창 모임 등 여초 모임에서는 왜 부서회식과 같은 바이브를 잘 느끼지 못하고 금세 지루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 전, 내 브런치글을 읽은 친구가, 글의 절반이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더라고 톡을 주었다. 파더스 데이도 몇 주 전이었으니, 이제는 아빠에 대해서 써야 할 시간이 왔음을 자각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엄마의 세계는 규율과 미래지향적인 계획과 절제가 가득했다면, 아빠의 세계는 흥미로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에너지와 불확실성에서 오는 흥분으로 채워졌다.


어린 시절, 아빠가 함께 놀아 주시던 주말은 새로운 경험의 장이었다. 산으로 강으로, 이 맛집에서 저 맛집으로, 동대문 야구장부터 효창운동장 축구 경기까지.

아빠 덕에 아바이순대나 보신탕, 도가니탕, 등 난도 높은 음식들을 접해 보았다. 지금껏 축구와 야구보기를 즐기는 나의 취미 역시 아빠와의 경기장 탐방에서 유래했다. 아빠는 모든 것을 놀이화 하는 재주가 있으셨다. 동네 아이에게 처음으로 맞고 들어온 날, 그레꼬로망 레슬링을 하자며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아빠가 가르쳐준 남자들의 세상은 예측불가능하였다.


남자들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와 도파민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여초모임에서 마주칠 확률은 극히 낮았다. 군대이야기, 축구이야기,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술 몇 잔 하다 보면 예측 불가능하고 비 정형적인 주제들이 낯설게 튀어나와 흥미를 돋운다.


엄마로부터의 자극이 나를 어찌 보면 바른 길로 인도했다면, 아빠는 나를 덜 지루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삶을 대하는 근본을, 놀이화하여 주신 탓이다.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습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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