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선택권
지난 주말은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으로 오롯이 채워졌다. 15부작의 시작은 말기암환자 상연이 자신의 안락사를 위한 마지막 여행에 10년간 의절했던 은중에게 동행을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 여성의 심리적인 배경을 그렸다는 점,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보다 그들을 돕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쿠팡플레이에서 볼 수 있다)를 떠올렸다. 두 작품은 죽음을 앞둔 이와 그를 돕는 사람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냈지만, 그 관점은 다르다.
베스트셀러 작가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출간 기념 사인회에 나타난 친구 스텔라로부터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낸 옛 친구 마사(틸다 스윈턴)가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듣고, 그녀의 병문안을 간다.
입원 중인 마사는 병실에 입원한 환자로서의 모든 표식을 거부한 채, 붉은 티셔츠에 진한 청색 바지의 평상복 차림으로 1인실 침대에 누워 있다. 항암제 투여가 실패로 돌아가자, 마사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치료를 거부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내게는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실행할 동안 잉그리드에게 옆방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창 밖으로 분홍빛 눈이 내린다.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소설 The Dead의 마지막 구절.
'눈이 내리네.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 위에'
반복적으로 이 영화를 지배한다.
마사는 죽음의 실행을 표시하는 규칙으로 닫힌 문을 정하면서, 아래층에 머무르게 될 잉그리드의 기다림 역시 하나의 구체적인 행위에 가까워진다. 열린 문은 실행 이전 곧 생존이며, 닫힌 문은 실행 이후 즉 죽음이기에 아랫방에 머물게 된 잉그리드는 매일 아침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 고개를 들어 문의 개폐 여부를 확인한다. 어느 날 닫힌 문을 본 잉그리드는 마사의 죽음을 예감하며, 구토와 호흡곤란을 동반한 패닉상태에 빠진다. 그런 잉그리드 뒤로 마사가 나타나, 문이 닫힌 이유가 열어둔 창에서 분 바람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지만, 실은 잉그리드를 위한 예행연습, 더 정확하게는 죽음 이후를 위한 마사 자신의 예행연습에 가까워 보인다.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노란색 화려한 정장을 입은 마사는 테라스 벤치에 몸을 기대 생을 마감한다.
그 시간, 잉그리드는 한때 두 여자 모두의 애인이었던 데미안을 만나 마사의 다가올 죽음과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파국 등을 이야기 나눈 후 돌아온다. 마사가 남긴 화장대 위의 편지가 잉그리드를 먼저 맞이한다. 마사의 죽은 육체보다 먼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는 순간에 있어 《은중과 상연》과 《룸넥스트 도어》는 대조적이다.
전자는 스위스라는 지역 안에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안락사를 앞두고 두 여자의 오랜 서사 끝에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낭만이다. 반면, 후자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당사자와 그 지지자가 현실적으로 겪어야 하는 현실이다.
잉그리드는 죽음이라는 존재에 침잠되지 않기 위하여, 마사와 지내는 동안 매일 PT를 받는다. 마사의 죽음 이후에는 형사로부터 범죄 협조의 혐의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는다. 마사의 안락사 선택을 알지 못했던 마사의 유일한 가족 딸에게 마사의 상황을 이해시키는 역할도 묵묵히 수행한다.
죽음을 향한 여정의 모습도 흥미롭게 대조된다. 《은중과 상연》은 일상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순간들로 채워진다. 파티와 같은 마지막 식사,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에 대한 대화 등을 통해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받아들이려 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의료적 절차와 개인적 선택이 만나는 지점에서 알모도바르 특유의 시각적 아름다움 즉 색의 강렬한 대조를 통하여 죽음과 삶을 극명히 대비시키고, 죽음조차 단절이라는 예술적 행위로 표현한다. 처절할 정도의 원색적인 화장과 의상을 입는 마사는 마치 무대에 오르기 전 모습이다.
은중(김고은)과 잉그리드 (줄리안 무어), 두 캐릭터 모두 죽음을 앞둔 이의 곁에서 자처하여 동행자 역할을 하지만, 그들이 겪는 내적 갈등의 양상 또한 다르다. 은중은 쌓여왔던 미움과 연민이 애정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잉그리드는 보다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을 한다. 타인의 죽음을 돕는다는 것의 의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험 앞에서 느끼는 인간적 한계에 대해 성찰한다. 은중이 40대라면, 잉그리드는 60대로 죽음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문화와 제도의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선택권을 존중하려는 노력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연대가야말로 죽음 앞에서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일주일, 전이된 암으로 사그라진 소꿉친구의 마지막 면회에서 만난 고통스러움은 죽음의 선택을 신이 아닌 인간에게 허락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었다.
베이비부머 선배님 중 한 분은 85세가 되면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가겠다고 적금을 들고 있다. 죽음의 순간을 지켜줄 은중이 있다는 것만으로 상연의 인생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