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인이 전공인 나는 패션과 관련한 연구 논문들을 쓰고, 기관이나 조직의 유니폼 디자인 업무도 종종 한다. 그리고 틈틈이 작품 연구도 진행해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그룹 전시에 참여하거나 개인전을 열어 작품을 발표한다. 보통 의상을 디자인하고 실물로 구현하는 직업을 패션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그러니 패션 디자이너가 나를 설명하는 데에 적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작업하는 나를 소개하는 문구를 써야 할 때면 프랙티셔너(practitioner)라고 쓴다. 프랙티셔너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기술을 요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넓게 보자면, 머리와 몸을 써서 무엇이든 꾸준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프랙티셔너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역시 꾸준한 리서치와 실험을 통해 작업한다. 하지만 디자인이라는 정제된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작업자보다는 꾸준한 작업 행위에 초점을 맞춘 프랙티스를 행하는 작업자가 더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디자이너보다 프랙티셔너라는 단어가 더 좋다.
박사논문으로 영국에서는 practice-led research라고 불리는 작품 논문을 완성했다. 여기에서 작품은 프랙티스에 해당하니, 작업하는 사람은 프랙티셔너가 된다. 2016년 늦여름, 나는 막 박사논문 작성을 마치고 심사까지 시간이 좀 남아있는 터라 아주 오랜만에 더없는 여유를 맛보고 있었다. 논문에 온 힘을 쏟아부어인지 번아웃이 와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뭐라도 즐기고 싶어서 런던의 현대미술 갤러리인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 갔다. 거기에서 미니멀리스트 추상화가로 불리는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아그네스의 고요하면서 단정한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고, 박사논문에 아그네스의 작품에 대해 고찰하기도 해서 반가웠다. 영상 속에서의 아그네스는 나이가 들어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아주 느린 몸짓으로 힘겹게 작업하고 있었다. 아그네스의 그림은 반복되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그네스는 마치 매우 괴로운 행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선 하나를 겨우 그려내는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실제로 아그네스 마틴은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작업실에 매일 출근해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을 보고 깨달았다. 저런 게 진정한 프랙티셔너구나.
박사논문에서의 나 역시 프랙티셔너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구상하고 구현해 보려고 했다. 연구주제는 소리의 측면에서 바라본 패션인데, 패션의 창작자, 착용자, 관람자 입장에서 패션을 바라보았을 때 생성되는 체험적, 감각적, 인지적 전경을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의 개념에서 착안하여 드레스-스케이프(dress-scape)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드레스-스케이프를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하고, 작품들을 구현했다. 흔히 떠올리는 아름다운 의상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을 뿐 아니라, 의상 말고도 영상, 소리, 설치작 등 다양한 매체와 도구들을 활용한 작업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작품 <Dress with the Sound of Its Own Making>에서는 미니멀리즘 아티스트인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931-2018)의 <Box with the Sound of Its Own Making>(1961, 나무상자를 제작하는 전 과정에서 일어난 소리를 녹음하고, 그 소리를 담은 스피커를 상자에 넣고 봉쇄함)의 작품을 모티브로 하여, 미니멀한 실크 드레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담긴 9시간짜리의 소리를 드레스 안쪽에 작은 스피커를 달아 전시장 안에 설치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빨간 털실로 모자의 표면 위에 손으로 스티치 해 나가는 영상, 의상의 패턴을 분해하여 소리로 변환하고, 그 소리를 다시 진동으로 변환하여 염색 파우더가 움직이면서 원단을 염색하는 작업, 안쪽에 수백 개의 뾰족한 스터드가 달린 스커트를 착용하고 난 후 피부에 자국 난 스터드의 흔적을 알지네이트로 찍어 기록하는 등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경험하고 제공하는 작업들을 해왔다. 그야말로, 프랙티셔너라는 이름 아래 닥치는 대로 실험했다.
이 시절에 한 작업들 자체가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몇몇 작업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힘을 빼고 일단 해보자 라는 가벼운 마음을 기를 수 있었다. 보통 작업을 대하는 진중한 마음에만 중요성을 두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심각하게 생각만 하면 뭐하나. 일단 무엇이든 떠오르는 대로 몸이 움직여야 머리도 따라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작업이나 공부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힘 빼고 해 보는 프랙티셔너의 태도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서 프랙티셔너로 불릴 수 있는 사람으로 어머니를 떠올렸다. 평생을 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50대 즈음에, 한 대학의 평생교육문화원에서 수묵채색화 수업을 듣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시며 매주 수업이 있는 금요일만을 기다리셨다. 일어나시자마자, 혹은 밤늦게까지 그림을 계속 그리시길 벌써 15여 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까지도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집중해서 작업하신다. 그동안 어머니는 굵직한 대회에서 수상도 하시고, 세어보진 않았지만 습작까지 포함하면 수 천 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약 5년 전부터는 캘리그래피도 배우시면서, 수묵채색화와 캘리그래피를 접목하여 어머니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작업들로 발전했다. 아마추어이며,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지만, 어제보다 나은 결과물을 위하여 그저 꾸준히 작업하는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프랙티셔너이다.
교수가 되고 나서는 조금 더 정제된 프랙티셔너가 되고자 하였다. 한 가지 분야를 정해서 느긋한 마음으로, 그러나 근면 성실한 태도로 다듬어 가보자 결심했다. 내가 패션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직업을 가진 만큼, 상업적 목적을 지닌 패션 분야에서 하기 힘들면서, 오래 할 수 있을만한 가치를 지닌 작업에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래 고민했다.
그렇게 앞으로 평생 재미있게 몰두할 나의 프랙티스를 정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누비를 떠올렸다. 누비는 퀼트나 우리가 흔히 '패딩'이라고 부르는 원단의 형태와 비슷하게 생겼다. 누비가 주는 올록볼록하고 도톰한 질감과 정갈한 직선의 반복이 이유 없이 좋았다. 좀 더 찾아보니 누비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손으로 만들어 입기 시작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는 데다가 우리의 문화유산이며,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된 누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누비를 보존하고 알리며,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거다 싶었다.
결정하고 나니 얼른 배우고 싶었다. 나는 여기저기 검색하고 문의한 끝에, 무형문화재 누비 전수자에게 전통 손누비를 1년 넘게 배웠다. 그리고 '통영누비'로 불리는 재봉틀을 활용한 누비도 배우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통영에 내려가 며칠 머무르면서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누비를 틈틈이 배워 작업한 지 1년이 지나 누비 의상들과 아트워크들을 가지고 개인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최근에 닥치는 대로 한 프랙티스이다. 나는 아무리 짧아도 정년퇴임 때까지는 내 전공분야의 프랙티셔너로 남고 싶다. 욕심을 부린다면 아그네스 마틴 할머니처럼 죽기 전까지 작업할 온전한 정신과 작업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내 작업을 대하다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내가 몰입해 열심히만 했다면, 결과물이 어설퍼도 무언가 하나 더 내가 시도해 봤구나 라는 생각으로 나를 격려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나 아티스트, 디자이너 같은 스페셜리스트만 프랙티셔너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프랙티셔너이다. 매일 등교해 공부하면서 어제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프랙티스고, 오늘 저녁엔 뭘 해 먹을까 매일을 고민하며 어제보다 나은 김치찌개를 끓이는 기술을 습득했다면, 주부도 프랙티셔너이다. 무엇이든 간에 힘을 빼고 받아들여 자신의 일상 속에서 습관으로 자리 잡고, 몰입하여 그저 꾸준히 시간과 정성을 주면, 어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깨닫거나 습득했다면 프랙티셔너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프랙티셔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