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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마 Nov 20. 2020

하루 10문장의 힘

올해의 숙원이었던 논문 한 편을 막 끝냈다. 드디어 마치다니...! 물론 투고한 후 또 다른 큰 문턱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 시름 놓인다.


연구 주제는 올해 초부터 생각해왔지만, 자료 조사와 함께 제대로 된 분석 체계를 갖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핑계지만 강의도 해야 하고, 학생 논문 지도에 심사에, 갑자기 닥치는 학과 일들 틈에서 논문에 오롯이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의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서, 논문을 쓰기에는 아침이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별의별 루틴들을 만들어봤다. 호수를 반 바퀴 산책하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카페 2층의 정해진 자리에서 작업을 한 두 달간 하기도 했고, 집 앞 언덕을 올라 잠시 멍을 때리며 커피를 마시고 내려와 책상 앞에 앉기도 했다. 책상을 내 방에서 거실로 옮겨왔고, 다시 도로와 산이 내다 보이는 거실 창을 바라보도록 옮겼다. 그럭저럭 써지긴 했지만 여전히 더뎠다. 10월이 되었고, 이제는 정말 논문에 집중해야 해!라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을 때 닥쳐 든 학과 보고서 작업에 정신이 쏙 나갔다. 10월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이러다가 올해가 다 가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데드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하루에 10 문장만 꾸준히 써서 내년 초라도 완성해서 투고하자 라고 마음을 놓아버렸다. 이맘때에 읽은 메이슨 커리의 [리추얼]이라는 책이 내 마음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는데, 세계적인 작가들도 하루에 200 단어 남짓을 채우느라 고민하며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뭐라고 논문을 뚝딱 완성할 수 있겠어. 그냥 천천히 가보자!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하루 10 문장은 결론적으로 꽤 괜찮은 타협이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대략 11시까지만 논문 쓰기에 할애하기로 하고, 하루 10 문장만 썼다. 포스트잇에 날짜를 써놓고, 하루에 10 문장 쓰는 날을 빨간 펜으로 X 표시를 해 나가는 것에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간 X가 없으면 기분이 찜찜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10 문장이 13 문장이 되고, 금방 20 문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니 신기하게도 오히려 쭉쭉 써내려 갔고, 완성이 가까워오니 없던 집중력도 생겨서 저녁에도 쓰고, 잠이 안 오는 새벽에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저녁에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안돼서 논문이 완성되었다. 내일 아침에는 논문을 안 써도 되니, 뭘 해야 할까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이 든다. 그리고 몇 년 전 박사논문 심사가 끝난 다음날 아침이 불현듯 떠올랐다. 논문 심사일도 오늘처럼 금요일이었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뜬 나는 행복한 마음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컸다. 논문을 안 봐도 되는 날이라니! 그럼 오늘은 뭘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거지? 불안해서 누워있지도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황해했던 그때의 내가 생생하다.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무작정 시내로 나가 쇼핑몰을 떠돌았다. 평소에는 구경하고 싶어도 참고 지나간 곳들이었는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평생 가장 재미없는 쇼핑이었다. 희한하게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안 오는 각성상태가 계속되어 살이 쭉쭉 빠졌다. 하지만 마음이 허하다거나 우울한 건 아니었으니, 아마도 즐거운 번아웃이 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내일은 무엇을 할까. 논문 심사가 줄줄이 있고, 학기는 기말고사를 향해 가고 있으며, 외부 강연도 잡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일만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매우 여유로운 마음으로 보낼 테다. 쇼핑몰은 안 가야지. 재미없을 게 뻔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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