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네에서의 내 차림새를 참 좋아한다. 주로 체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자루 같은 실루엣을 하고 있다. 낡은 후디에 펑퍼짐한 츄리닝 바지, 패딩점퍼, 어그부츠와 백팩을 멘다. 후디는 박사 졸업식날 기념으로 언니가 사준 건데 캥거루 주머니 한쪽이 떨어져 공그르기로 꿰맸다. 바지는 넓은 허리밴드에 허리부터 빵실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귀여운 츄리닝이다. 옷을 잘 사지 않는 내가 얼마 전 나이키에서 산 '무려' 신상품이다. 가족과 친구들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옷은 대체 어디서 산 거냐고 물었다. 어그부츠는 내가 20대 때 사서 올해 19년 차다. 이 부츠는 맨발에 신어도 정말 따뜻해서 유행을 하든 말든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신는다. 엄마는 나 때문에 부츠장사 다 망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 새 어그로 바꾸려고 했는데, 어그가 올해 트렌드 아이템이 돼 가격이 뛰는 바람에 일단 참고 신을 요량이다. 패딩은 내가 고등학교 때 집 앞 백화점에서 샀었다. 가볍고 따뜻하며 유행을 탈 만한 디자인 요소가 없어서 너무나 잘 입고 다니고 있다. 백팩도 오래돼 끈 표면이 다 벗겨졌고, 지퍼 고리에 달린 손잡이도 없어져 다른 끈으로 대체한 지 꽤 되었다.
아, 이렇게 묘사하고 나니 이 정도면 사적 자아를 넘어서 비밀 자아의 옷차림으로 봐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한가 싶다. 하지만 이 차림으로 탄천을 산책하고, 장을 보고, 동네 도서관에 가고 그러면 그냥 '내'가 된 것 같아서 참 편하다. 그러니까 츄리닝은 나의 비밀 자아를 표현하는 아이템이 맞나 보다.
몇 년 전만 해도 나한테 그렇게 츄리닝 좀 입고 다니지 말라고 하던 친구들이 츄리닝을 입는다. 하지만 그들의 츄리닝은 나의 츄리닝의 맥락과는 다르다는 걸 츄리닝과 함께 매치한 샤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츄리닝은 '지금의 패셔너블함'이라는 세계의 기의를 지닌 기표였고, 나의 츄리닝은 기의가 '츄리닝' 그 자체인 기표인 것이다. 그들의 츄리닝은 나타나고, 소비되고, 또 사라질 '패션'이다. 나의 츄리닝은 올해도, 5년 전에도, 봄에도, 겨울에도, 도서관에 갈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장을 볼 때도 함께 하는 시간적, 장소적, 기후적 상황적 특수성이 가장 희미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의복'이고 말이다.
아무튼 나에겐 이제 더 이상 자아표현을 옷으로 하고 싶은,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적 자아와 비밀 자아에 해당하는 거다. 공적 자아를 위한 옷들은 또 그것대로 마련해 놓고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common sense를 갖추고 코스프레는 또 열심히 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