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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마 Oct 16. 2020

아델과 졸업식

로열 알버트 홀. 오른쪽 밝은 불이 켜진 건물이 RCA이다.



나의 삼십 대 중반 전후의 소원은 단 하나였다. '박사학위'. 졸업하고 교수가 될 수 있네 없네까지 생각하는 것도 사치였다. 그냥 일단 졸업만 바라봤다.  

 

내가 다녔던 런던 Royal College of Art (왕립 예술대학, 이하 RCA)는 켄싱턴 로드를 사이에 두고 하이드파크를 마주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영국 내 클래식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공연을 하는 Royal Albert Hall (이하 로열 알버트 홀)이 있었다. 석사 시절에는 친구들이랑 매년 여름마다 열리는 5파운드(약 1만 원) 짜리 스탠딩 티켓으로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BBC Proms에도 가고 했었지만 (맥주를 마시며 바닥에 누워서 볼 수도 있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어도 공연 보러 다닐 여유가 통 없었다.


그런 내가 1년을 마치는 튜토리얼을 끝낸 후, 나에게 선물을 주고자 한 공연을 예매했다. 영국 왕실 공식 하피스트 Catrin Finch가 연주하는 Bach의 Goldberg Variations 공연이었다. 공연은 튜토리얼 당일 저녁이었고, 학교 바로 옆이니 스튜디오에서 좀 쉬었다가 가면 될 테니 딱이었다. 공연은 만족스러웠다. 이래서 하프 소리를 천사의 목소리라고 하는구먼 할 정도로 소리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는 생생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튜토리얼이 끝나 나는 긴장이 확 풀려있었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제공해 준 칵테일을 마시며 불면 치료를 위해 활용되었다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니 어찌나 노곤 노곤하던지. 아무튼 잘 쉬다가 집에 돌아왔다. 

 

내 책상에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로열 알버트 홀(왼쪽)


로열 알버트 홀이 그 시절 나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졸업식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로열 알버트 홀에서 졸업식을 개최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학교는 우리 학교와 근처의 왕립음악대학교와 임페리얼 칼리지뿐이었다. 메인홀 안은 매우 고풍스럽고, 천장에 무언가 음향효과를 위한 장치인 듯 보이는 푸른빛의 풍선 같이 생긴 대형 구조물이 떠다닌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졸업식을 연다니 졸업을 하고 싶은 의지가 더 부풀어 올랐다.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통학할 때 매일 지나고, 스튜디오 창문을 통해서도 내려다 보이니 저기에서 열리는 내 졸업식에 언제 갈 수 있나 정말 매일같이 생각했다.


입장 티켓을 얻으면 선배들의 졸업식을 보러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가지 않았다. 일생에 단 한 번 있을 내 졸업식 때에 가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박사 초반에는 열심히 해서 저기서 다이슨한테 학위장 받자!라고 파이팅 넘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로열 알버트 홀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아... 들어갈 수 있겠지?라고 자신감이 점점 떨어져 갔다.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면 홀 밖에서 졸업가운을 입고 가족과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박사 논문 제출이 얼마 남지 않아 한국에서 방학을 보내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뭘 볼까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아델(영국 가수)의 콘서트 영상이 있었다. 아델의 노래들은 워낙 유명해서 몇 곡 정도는 알고 있긴 했지만 썩 좋아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로열 알버트 홀에서 콘서트 한 영상이라고 하길래 봤다. 아델 역시 로열 알버트 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했고, 관중들에게 "이 공간 좀 보세요, 정말 posh(뽐내는 듯하게 화려한) 하지 않아요? "라며 푸른빛 풍선 같은 구조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델의 노래 중에서 'Chasing pavements'라는 곡이 있다. 전에도 노래가 좋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영상에서 아델이 이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나 가사가 와닿던지. 후렴구의 반복되는 가사는 'Should I give up  or should I just keep chasing pavements / even if it leads nowhere / Or would it be a waste / even if I knew my place / Should I leave it there'인데 '포기해야 하나 / 아니면 이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나 / 아무 데도 데려가지 않는 데도 / 아니면 그냥 시간 낭비일까 / 내 주제를 알고 있는 데도 / 그만둬야 할까'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가사가 내 상황이랑 딱 들어맞을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할 수밖에 없는 내 생활을 보고 가사를 썼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나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가 아델이 아름답게 노래를 불러주고, 장소는 로열 알버트 홀이고, 관중들도 눈물을 훔치고, 나는 어두운 비행기에서 혼자 또다시 런던으로 가는 착잡한 상황이 어우러져 비행기 안에서 찌질하게 절절 울었다.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졸업식


결국 나는 졸업식에 참여했다. 졸업식 전날 졸업식 입장 티켓이 담긴 봉투를 받아 언니와 조카가 기다리고 있는 로비로 내려가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학위장이 아니라 입장 티켓을 받고 눈물이 쏟아지다니. 하하. 우는 나를 보는 언니도 눈물을 글썽였다. 


다음날 우리는 근처 역 꽃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수국을 사서 즐겁게 졸업식에 참여했다. 로열 알버트 홀에 들어가기 전에 학교 건물도 구경하고, 클레어는 초등학생인 조카를 이끌고 스튜디오 여기저기를 다니며 신나게 설명해 주었고, 조카는 한참 후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열 알버트 홀에 입장. 언니와 떨어져 배치된 자리에 앉고, 한 명씩 나와 명예교수인 다이슨(청소기 다이슨 아저씨 맞다. RCA 석사시 다이슨 청소기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이 졸업장을 수여한다. 한 명 한 명 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무대에 뛰어가는 학생도 있었고, 관중을 향해 제스처를 취하는 학생도 있었으며, 어떤 여학생은 셀카봉을 들고 다이슨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모두 신나 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패션 전공에서 박사-석사 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회자가 이제 패션 전공입니다!라고 하니 관중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패션 학장인 Zowie가 나에게 'Professor Ma!'라며 신나 했다. 바로 내 이름이 불려졌다. 무대를 걸어가서 다이슨에게 졸업장을 받고, 다시 걸어 들어가면 된다. 백스테이지로 가는 통로로 안내하는 학교 스탭이 나를 향해 주먹을 주고 해냈어!라는 표정을 지어준다. 비자 연장할 때 업무 처리를 잘해주지 못해 나를 꽤 고생시킨 학교 스탭이라 한동안 내가 엄청 원망했던 사람이다. 이제 아무려면 어떠나. 다 해결되었는데! 나도 흔쾌히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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